<독자칼럼>'분노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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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분노의 슬픔'
  • 재외동포신문
  • 승인 2014.05.0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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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대표(우한 한향삼천리관리 유한회사)
날씨가 며칠 개다가 어제는 다시 한 차례 비가 오더니 오늘 아침부터는 5월의 전형적인 쾌청하고 맑은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방의 땅에 다시 이렇게 5월이 시작되는가 봅니다. 중국에 와서 벌써 일곱 번째 봄을 맞이해 보면서 문득 7년 전 어느 날이 생각이 납니다. 막 중국에 들어와 살던 그 시절이라 중국어도 잘 모르고 솔직히 집에 앉아 있으면 제가 살고 있는 호북성이 어디쯤이고 하남성과 사천성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집에서 전화가 와서 “중국에 무슨 큰일이 터진 것 같다”는 겁니다. 7년 전의 사천성 대지진 사건은 이렇게 우리 가족들에게 그 소식이 전해진 겁니다. 아내가 집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소파가 이리저리 흔들려서 딸에게 “내가 약간 어지러운가 보다”는 말을 했을 정도니 그 지진의 규모가 얼마나 컸을지는 상상이 가는 일입니다. 약 8만명의 중국 사람이 죽은 겁니다. 800명도 아니고 8,000명도 아니고 8만 명입니다.

연일 TV를 통해서 그 참혹한 현장과 사람들의 슬픔 그리고 정부 관계자들의 분주한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지구에 사는 모든 이들도 같이 슬퍼하고, 나름 도움의 손길도 보낸 줄 압니다. 그야말로 천재지변인 겁니다. 말 그대로 천재지변이라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는 사건입니다. 졸지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은 말로 표현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심지어 분노할 수는 없는 것이 천재지변의 속성이라면 속성입니다. 제가 무슨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사람에게는 분노에 찬 슬픔이 있고 체념해야 하는 슬픔이 있을 겁니다.

문제는 원망과 분노가 좀처럼 가시지 않는 슬픔이고 좌절입니다. 도대체 현실의 슬픔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내 자식도 사고를 당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이미 죽은 자식이 다시 살아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더 이상의 슬픔과 원망 그리고 애절한 통곡도 사실은 다 부질없다는 것도 압니다. 이제는 냉정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쩌면 죽은 자들에게도 위로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잘 안 되는 겁니다. 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원망스럽기 때문입니다.

분하고 억울한 슬픔은 이토록 사람을 더 슬프게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분하고 원망스러운 겁니다. 어떻게 어린 학생들이 죽어가는데 정부와 관계 대책본부와 선장과 선원들이 그 정도로 내팽개치고 방치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가는 겁니다. 같은 자식을 키우는 사람들이, 심지어 인간의 탈을 쓴 어른들이 자식들을 그렇게 죽어가게 했다는 사실이 당사자인 부모 입장도 그렇고 우리 모두를 도무지 이해가 안 가게 만드는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럴 수는 없다는 분노와 원망이 자식이 죽은 슬픔보다 더 커진 겁니다. 중국 사천성 지진에서 일어난 슬픔과는 다른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슬퍼서 슬픈 게 아니라 분한 마음이 더 드는 겁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저 자신을 다시 생각해보니 제가 분하고 원통해야 할 이유가 없더군요. 제가 만약 선장이라면, 죽음이 코앞에 닥친 선원이라면, 물살이 거세게 이는 바다 한가운데 출동한 해경이라면 어찌했을까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면서 결코 그 사람들을 원망할 자신이 없더군요. 어쩌면 어느 스님의 말씀처럼 그 모든 것이 우리 모두의 모습일 겁니다. 40일 주야를 굶고 광야에서 헤매다 지친 예수에게 이 돌을 떡으로 만들면 세상 모든 권세를 주겠다고 말하는 악마의 유혹 앞에서 우리 중의 누가 그 유혹을 예수처럼 뿌리칠 수 있을까요? 이미 제 모습이 병들고 자판기처럼 변해버린 마당에 “왜 그 사람들은 그랬을까?”를 따지고 캐고, 그들에게 분노할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저도 50 평생을 살면서 어쩌면 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비겁함과 극단의 이기적인 삶을 살았다는 생각입니다. 정말입니다. 사실입니다. 부끄럽고 한심한 행동을 꽤 많이 한 듯합니다. 교회는 건성으로 다니면서 신앙인 운운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눈앞의 이익 앞에서 그토록 말로 떠들던 사회적 가치와 헌신 그리고 인간의 도리를 내던진 일은 아주 많습니다. 내 자식만 잘 살고 나만 잘 먹으면 된다는 생각은 늘 제 삶의 주제였을 겁니다. 아마 제 자식이 그 당시 출동한 해경이라도 “너만은 가능한 물속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을 겁니다. 북한이 연평도를 폭격했을 때 만약 우리 아들이 휴가 중이었다면 그래서 죽지 않았다면 저는 다른 사람 몰래 감사 헌금을 했을 겁니다. 교회에 계신 하나님이 그 정도 수준으로 제 마음에 있는 겁니다. 제 모습입니다.

우리 한국사회가 나갈 올바른 방향 내지는 사고 원인과 대책 그리고 원망과 분노를 대처하는 방법같은 것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만한 능력도 자신도 없습니다. 그 대신에 오늘 아침에는 통렬하게 반성을 해 봅니다. “나는 과연 자신 있게 물속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나는 오늘도 자식들에게 성공하는 삶보다는 희생하는 삶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