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最善)을 다한다는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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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最善)을 다한다는 말은?
  • 조현용 교수
  • 승인 2013.08.05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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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최선입니까?’라는 말이 드라마에 나오면서 유행한 적이 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는 삶을 칭찬하고 좋아한다. 얼마 전에 나는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 인생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글을 보고 잠깐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최선을 다한다는 말을 그저 열심히 바쁘게 사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열심히 사는 것을 훌륭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아우렐리우스도 공적(公的)인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아름다운 일로 이야기하고 있다.

최선(最善)의 반대말은 최악(最惡)이다. 최선이라는 말은 가장 선한 것, 즉 가장 좋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가장 나쁜 것의 반대말이다. 우리는 최선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선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버리고 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한다.’는 말을 그저 열심히 한다는 말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단순히 열심히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있는 힘껏 노력한다는 의미로만 보기에는 무언가 부족함이 있다.

최악을 다한다는 말은 없지만 이 표현을 생각해 보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가 떠오른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가장 선한 것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의미가 된다. 나쁜 일은 아예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일이다. 최선이라는 단어 속에 이미 선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 부분은 바로 사회적 이익을 위한 것이다. 나만을 위한 일은 최선일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어릴 때 사회 시험이나 윤리 시험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우리는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할 때 단순히 모여서 사는 동물이라는 정도로 정의를 마무리했던 것 같다. 학교에서도 그 이상의 설명은 잘 없었던 듯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에서 큰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보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인간은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즉, 나보다는 사회를 위해서, 더 큰 목적을 위해서 살아야 함을 보여주는 말이다. 단순히 모여 사는 것이 아름다운 가치일 수 없다. 내가 이 사회를 위해서 무언가 기여할 때 나도 사회적 동물이 된다. 최선은 내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자신이 최선을 다한다고 말하는 것들을 살펴보라. 그 일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 가치는 우선 목적이 선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공부를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 우리는 연습을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 하지만 왜 공부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선한 목적이 있는가? 단순히 다른 사람을 누르고 나 혼자만의 안락한 삶을 위해서라면 최선은 아니다. 무엇을 연습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최선이라는 가치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동안 최선이라는 말 속에 감추어진 내 모습을 돌아본다. 쉽게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지만 그게 나를 위한 것인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없었다. 열심히 했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안하였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최선이라는 말 앞에서 핑계가 되었을까? 나는 최선을 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아픈 상처를 주었을까? 최선이라는 가치 속에 담겨있는 착한 아름다움을 다시 생각해 본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