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재외동포 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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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재외동포 이야기(1)
  • 김정희
  • 승인 2004.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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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랑스런 한민족

전 세계에 700만명이란 수많은 재외동포들이 살고 있음에도 국내에서 동포에 대한 이해도는 매우 낮은 편이다. 이에 대한 안타까움이 커져가고 있는 때, 국내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 '우리는 자랑스런 한민족'이란 제목으로 재외동포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와 있다는 것을 알고 최초로 신문 지면에 소개하게 되었다. 어린 아이들에게 정확하고 바르게 동포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는지 살펴본다. <편집자글>


그림을 보고,  다음 물음의 답을 생각해 봅시다.

선생님, 어제 우리말은 서투른데 우리와 생김새가 거의 같은 외국 사람을 보았어요.
응, 재외동포를 본 모양이구나. 사는 곳이 다르지만, 우리와 한 민족인 사람들을 재외동포라고 한단다.
우리와 한 민족인데 우리말이 왜 그렇게 서투르지요?
여러 가지 이유로 오래 전부터 우리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살았기 때문이란다.
재외 동포들은 어떤 이유로 다른 나라에 살게 되었을까?


폐허 속에 핀 동포애

미국 역사에서 가장 포악한 분규 중의 하나로 기록될 로스앤젤레스(LA) 폭동 때, 교포들은 시커멓게 뼈대만 남은 상가 건물의 잿더미를 치우면서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폐허로 변한 가게 앞에서 넋을 잃고 있는 교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서로 격려하며 주변을 정리했고, 피해 복구에 필요한 물건들을 교환하여 사용했습니다.
라디오 코리아는 구호를 바라는 손과 구호해 주는 손을 이어 주는 다리였습니다. "문을 연 식당이 없어 몇 끼를 굶었습니다." 라는 안타까운 동포의 사정이 전파를 타면, 곧 "어딥니까? 설렁탕을 무료로 배달하겠습니다." 라는 식당 주인의 응답이 전해집니다. "깨진 출입문과 유리창을 고쳐야 하는데, 베니어 합판 한장 값이 10배 뛰어 50달러나 되니......." 라는 한숨에는 "베니어 합판 70장이 있습니다. 장소를 말해 주세요." 라고 한인 목재상이 대답해 줍니다.
이러한 가운데 고국으로부터 성금과 위문품이 전달되어 이들의 무거운 어깨를 한결 가볍게 하였습니다. 연예인들은 교포들을 위해 자선 공연을 계획하는가 하면, 폭동의 소용돌이에서 광고 수입을 잃은 라디오 코리아를 위해 자신의 출연료 일부를 내기도 하였습니다. 폐허가 된 터전을 복구하기 위해 애쓰는 교포들과 이들을 돕는 일에 관심과 성원을 잊지 않는 고국 동포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고 있었습니다.

<사진> 로스앤젤레스 코리아 타운을 동서로 가르는 올림픽 도로

사연 많은 쿠바 이주

초기 멕시코 이민 이후인 1921년 3월, 멕시코를 찾았던 300명의 한인들이 탄 배가 쿠바의 동쪽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힘겨웠던 멕시코 사탕수수 농장을 떠나, 당시 '동쪽의 진주'라고 불리던 쿠바를 찾아간 것입니다. 당시 쿠바 정부로서도 한인들의 노동력이 절대 필요했습니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쿠바에서는 사탕수수 재배가 번창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쿠바에 도착한 많은 한인들은 다시 칼을 잡고 사탕수수를 잘랐습니다.
"매일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오후 5시에 일이 끝나는 고된 나날이 계속됐지요. 농장일을 마치면 식당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에서부터 닥치는 대로 했어요."
아바나에 살고 있는 장 할머니는 더듬거리는 우리말로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아바나 시내에서 큰 중국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는 장 할머니 아버지의 고향은 평양, 어머니의 고향은 서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돌아가셨습니다. 장 할머니의 아버지는 세상을 뜰 때까지 쿠바의 공용어인 에스파냐어가 서툴러 고생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일이 생기면 종종 아들들을 불러 의사 소통을 했습니다. 그러나 장 할머니에게 아버지는 기억 저편에 있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 자체였습니다.
"집에 계실 때에는 '이리 와라.',  '식사해라.' 등 우리말을 사용하셨지요. 자식을 교육에 정성을 쏟으셨고, 우리는 진심으로 아버지를 존경했습니다."
농장에서 일하던 시절, 쿠바 한인들의 주식은 쌀밥이었습니다. 쿠바에서 생산된 쌀로 밥을 지어 먹고, 김치와 고추장까지 담가 먹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말을 모르는 쿠바 한인 2,3세들도 '고추장'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하고 있습니다.
쿠바 한인들에게도 피끓는 민족 의식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이민 초기 쿠바 한인들의 비극적인 생활상이 외부에 전해지자 미주 한인회에서 모금 활동을 벌인 적도 있지만, 나중에 이들은 일제 강점기인 1937년과 1938년에 중국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들에게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요?
세월의 물살은 거스를 수 없는 법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에게서 전해 들은, 고향에 대한 애틋한 생각은 점차 엷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한국은 더 이상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모습으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아바나 시내를 질주하는 우리 나라 자동차와 가전 제품들이 이들에게 비친 오늘날의 한국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