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래침 뱉고 떠난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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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래침 뱉고 떠난 대한민국
  • 김길남 본지 편집위원, 전 미주총연 회장
  • 승인 2012.11.19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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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물보다 진하면 사랑은 피보다 진하다

미국 Washington 주 상원본회의 의장석에 앉아 상정된 의안을 토론하고 표결하여 결의안과 법안의결을 선포하는 상원부의장 신호범 박사는 한국인이다. 주상원은 주지사가 당연직의장이 되기 때문에 부의장이 실질적인 상원의장이다.

악몽 같이 18년의 처절한 한국생활은 그가 미국으로 떠날 때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고 한국 땅에 가래침을 뱉고 떠났다. 1935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신호범의 한국생활은 그가 4살 때 어머니가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나고 머슴살이 하던 아버지마저 말없이 어디로 떠나버렸다. 가난한 외할머니의 보살핌으로 3년간 외가에서 자라다가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7살에 무작정서울로 와서, 비를 피할 수 있는 처마를 찾아 잠을 자고, 남대문시장에 있는 식당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 찾아 질긴 생명을 유지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 먹다 남긴 음식으로 1조 5천억 원에 달하는 음식 쓰레기가 나오지만 당시에는 모두가 가난하여 남기는 음식쓰레기가 거의 없어 쓰레기통에서 먹을만한 찌꺼기 찾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책보자기를 들고 학교 가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가 없었다. 학교가 가고 싶어 학교근처를 서성대면 거지 왔다고 아이들이 학교에 일러 쫓겨나곤 했다. 어느 날 횡재를 만나 쓰레기통에서 닭다리를 찾아 먹고 나서 쓰레기통을 뒤지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남아 쓰레기통에서 주운 몽당연필과 시멘트 포장지를 들고 학교로 갔다. 1학년 교실창밖에서 가, 나, 다…를 따라 적고 있는데 학교 소사가 와서 “무얼 훔치러 왔느냐”고 잡혀가서 두들겨 맞은 것이 Paul Shin의 한국에서의 최종 학력이다.

Paul Shin이 15살에 미군부대 House Boy로 취직 되어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될 때 까지 8년간의 생활은 음식점 쓰레기에서 먹을 것을 찾지 못해 깡통을 들고 구걸하던 기억, 추위를 피하지 못해 손발이 얼어 동상으로 고생하던 일, 하루 먹고 자는 일이 너무나 벅찬 모든 기억들. 한국에서의 기억은 이것이 전부였다. 미군부대 주변은 먹을 것 찾기가 수월했다. 그래서 그는 구두닦이통을 준비해 미군부대 주변을 서성이다가 단골 미군 대위를 만나 전속 House Boy로 취직이 되었다. 배 불리 먹을 수 있고, 따뜻한 잠자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천국 같았다.

생각할수록 고마운 분이라 성심을 다하여 일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군의관이 귀국을 몇 달 앞두고 “자네 나하고 미국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무슨 말인지 다시 물어보니 “나는 아들이 없기 때문에 자네를 내 아들로 입양하여 미국으로 데려 가고 싶어서 자네 생각을 묻는다”고 했다. 신 박사는 그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한다. 1953년 수속을 모두 끝내고 미국행 배를 타면서 “다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부산부두에 침 뱉고 한국을 떠났다.

미국에 도착 후 양아버지는 Paull Shin을 고등학교에 데려갔다. 고등학교에서 한국의 학력증명을 해오라고 했다. 그래서 중학교에 가니 “초등학교 졸업을 하지 않고는 입학 할 수 없다”고 해 다시 초등학교에 가니, “나이가 너무 많아 입학 시킬 수 없다”고 했다. 집에 와서 울고 있는 Paull Shin에게 양 아버지는 독학지원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12년 과정을 하루에 3~4시간씩만 잠을 자고 공부했다. Paull Shin은 열심히 만하면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승만ㆍ서재필 박사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는 비록 영한사전이 없었다 하더라도 한글과 한문을 배위서 미국 온 사람들이지만 Paull Shin의 한국에서 학력은 초등학교 1학년 교실 밖에서 30분 도둑공부한 것 외에는 없었다.

당연히 한글을 쓰지도 읽지도 못한 한글 문맹자라 사전을 봐도 한글을 몰라 무슨 말인지 알 수 가 없었다. 영어단어 하나하나를 몸으로 이해하고 공부해 가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경제적 부담을 덜어 하나님 같은 양 아버지를 돕는 일로 시작한 접시닦이, 공사판 막일을 하면서 공부하여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꿈에 그리던 버리엄 영 대학에 입학하여 학사를, 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석사를, University of East Asia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1969년부터 대학교수로 재직 할 때 시애틀한인회 한인회장에 당선 되어 한인사회봉사를 하면서 한글을 독학으로 조금 익혔다. 1992년 Washington주 State Representative 하원의원에 당선, 1996년 11월 State Senator주 상원에 당선되었다.

미국에서 최초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김창준 씨는 연세대학을 다니다가 중앙대학을 졸업하여 하원의원 선거 때 중앙대학 동문회와 연세대학 동문회 모두가 그를 지원하고 도왔다. 그러나 Paull Shin이 하원의원에 처음 출마했을 때 한국에서 다닌 학교가 없어 후원할 동문회가 없어 전 지역의 한인회가 중심이 되어 후원행사로 후원금을 전달하고, Paull Shin 본인 역시 미국에서 최초로 유권자 호별 방문을 감행했다. 구두 5 컬레가 닳도록 지독한 강행군을 계속하면서 “나는 한국의 고아였습니다. 미국에 와서 박사학위를 받아 대학교수가 되도록 지원해 준 미국을 위하여 일하겠습니다.” 하원의원을 거처 상원의원에 당선되고, 그리고 상원부의장까지 당선되었다.

한국에서 대학졸업하고 돈까지 가져 와서 그냥 ‘이민 정착만 하라’ 해도 살기가 어렵다는 미국에 한글 한 마디 읽지도 쓰지도 못하고, 18살에 와서 학문적으로 대학교수에 사회적으로 미국상원의원을 시작하면서도 가래침 뱉고 떠난 대한민국과 한 마디 말도 없이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생각을 하면 할수록 분하고 원통한 생각만 들었다. 태평양 저 건너에는 ‘글자 한 자 배워 보겠다고 교실 담벼락에 서 있는 나를 도둑놈으로 취급하여 두들겨 패는 나라’ 대한민국이 있고,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시장바닥의 쓰레기통 뒤지며 살아가게 한 아버지가 있는 곳이라 생각하니 태평양마저 보기 싫었다.

어느 날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오니 키우던 애견 Merry가 예쁜 강아지 3마리를 낳아 이리저리 핥아 주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애견 Merry의 새끼사랑을 보면서 저주스러운 아버지 생각이 났다. 집에서 키우는 개도 제 새끼를 저렇게 사랑하는데 ‘우리아버지는 저 개보다도 못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개보다 못한 사람이 아버지’란 생각이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아버지만 생각하면, ‘나는 어찌 이리도 불행한 운명인가’를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창밖을 보니 무심코 쳐다본 하늘에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사람도 생물인데, 새끼사랑은 고사하고 동물적인 본능마저 없는 저주스러운 아버지에 대한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내가 모르는 사연이 있을 것이다’. ‘아니다’라고 몇 개월을 반복하다 수소문 끝에 주소를 확인하고 가래침 뱉고 떠난 한국으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판자촌 골목길을 돌고 돌아 찾아간 아버지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돼 버린 자식이 40년 만에 찾아왔는데도 알아보지도 못하고 쓰러져 있었다. 낯선 이복동생 그리고 계모만 만나보고 미련하게 한국까지 찾아온 자신을 나무라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생각한대로 짐승보다 못한 아버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돌아온 후에도 확인한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서 다시 한국으로 아버지를 찾았으나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그 상태였다.

두 번씩이나 확인한 사실에 ‘미련을 두지 말자’고 다짐을 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하루 24시간 1년 내내 저렇게 취해 있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미국에 도착 후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아버지는 술을 잘 못하시는 분이고, 평소 술을 드시지 않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사전에 연락하지 않고 아버지를 찾아갔다. 맑은 정신으로 40년만에 아들을 만난 아버지는 아들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아버지, 호범이가 왔습니다” 해도 대답도 없이 울고만 있었다.

한 시간인가 지난 후에 목 메인 소리로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온다고 하기에 죽을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고 해서 술을 먹고 쓰러져 있었다”면서 “내가 너에게 할 말은 한 마디도 없다”고 하고서는 계속 흐느꼈다. Paull Shin은 60년을 살아오면서 풀리지 않던 질문을 했다. “아버지, 어째서 아버지는 네 살 짜리 어린 저를 혼자 버리고 떠났느냐”고.
대답을 못하던 아버지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그때 당시 대부분의 머슴들은 결혼을 하지 못하고 머슴살이를 하는 것이 보통인데, 내가 네 엄마와 결혼하여 일 년 품삯으로 보리 한 말 나락 한 말씩 받아야 한 달 양식도 되지 않아서 네 엄마는 동네 품을 팔아 겨우 지내 왔다. 그런데 3년 내리 흉년이 드는 통에 세곡도 못 받고, 엄마가 품팔이 양식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없어져 굶기를 밥 먹듯 하다가 영양실조에 병이 걸려 너의 엄마는 죽었다. 동네 이집 저집에서 밥을 얻어먹이다가 ‘계속해 밥을 주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너를 이틀이나 굶기게 되었다.

너를 더 이상 데리고 있다가는 굶겨 죽이겠다고 생각해 외할머니집에 연락해놓고 뒤돌아보고 뒤돌아보면서 집을 떠났다. 네 어린창자를 채울 밥 한 끼 구하지 못하여 너를 버린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40년 세월 쌓여온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자식 앞에 꿇어앉은 아버지를 안고 함께 울고 또 울었다. 저주스럽고, 개보다 못한 아버지가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아버지로 변하는 순간 방 안에 가득 모인 식구들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그때 아버지가 자식을 안고 있어야 한다는 본능적인 사랑으로 같이 있었다면 어머니처럼 굶어 죽었던지 아니면 살아 있었다 해도 지금 무엇이 되어 있을까 생각하니, 뒤돌아보고 뒤돌아보면서 떠난 아버지 때문에 미국 대학교수에 상원 부의장인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 살을 찢는 아픔을 견디고 자기를 살려낸 아버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버지를 가진 자신을 찾게 되었다.
아버지와 이복동생 그리고 계모까지 전 가족이 미국으로 초청돼 미국에서 살다가 10년 전 그 위대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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