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대안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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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대안은 없는가
  • 임현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 승인 2012.03.30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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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월가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 여러 도시들로 파급되었던, 부유한 1%에 대한 가난한 99%의 ‘점령하라!’(Occupy!) 시위는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사회경제적 양극화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맹점을 알면서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다.

물론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이 제안한 ‘창조적 자본주의’도 있지만, 그것은 ‘시장에 의한 정치’를 ‘사람이 살아갈만한 사회’로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타인에 대한 보살핌’만 가지고 시장의 독주를 막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아나톨 칼레츠키(Anatole Kaletsky)의 ‘자본주의 4.0’은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충분한 검토의 대상이 된다. 그는 “리먼 브라더스사가 파산한 2008년 9월 15일은 단순히 하나의 투자은행이나 금융시스템의 실패로 기억되어서는 안된다. 그 날 무너진 것은 정치철학과 경제시스템 전체이며 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가치관이 무너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철학과 가치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동하기 위해 오늘의 시장근본주의에 대한 개혁을 강조한다.
현재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의 돼지국가(PIGS: 포르투갈,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은 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야기된 원칙과 가치의 붕괴이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적 가치 아래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시작된 조그만 이기심이 상대방에 대한 거짓말과 속임수를 통해, 무모한 투자 관행으로 이어져 종국에는 공동체를 해체하고 사회갈등을 낳고 말았다는 것이다.

반칙과 편법이 전염병처럼 퍼지면서 공동체 안 구성원들 사이의 신뢰는 무너지고, 시장은 물론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극대화된 것이 바로 ‘점령하라!’시위로 나타난 것이다.

‘자본주의 4.0’은 자본주의를 전면 부정하기보다 그 안에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한다. 이제 정부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옹호해야 하며, 더 이상 시장만이 유일한 답이라는 오만한 과신을 버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시장을 해결사로 보고 정부를 문제아로 여긴 신자유주의 세계화 논리에서 벗어나, 더 이상 정부를 악마처럼 여기고 규제를 조롱하며 행정을 비아냥거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부와 시장 모두 잘못될 수 있고, 때로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자본주의 4.0’은 정부와 시장을 분리하는 대신에 더욱 가까운 관계로 설정한다. 그 이유는 오늘의 세계화는 정치경제적 상황을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없고 애매모호한 세계로 바뀌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규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용과 복지를 관리할 수 있도록 정부의 능력이 커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4.0’은 시장과 정부 모두 완전하지 못하며 잘못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대로 제도적 적응력을 키우며 이데올로기적 유연성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혼합경제를 지향한다. 이 혼합경제에서는 특히 정부와 기업이 대립관계가 아니라 동반자 관계를 설정한다. 예컨대, 석유에너지 고갈(peak oil)을 두려운 마음으로 전망하면서도 시장은 오염 비용을 가격에 포함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혼합경제 아래에서는 석유에너지 고갈이라는 새로운 환경을 이겨낼 수 있도록 시장가격을 바꿀 수 있다.
석유에너지 사용에 탄소세금을 부과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대비한 대체에너지 개발보조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 4.0’의 한계는 지구적 차원의 대응전략 및 협력방식을 제대로 내놓지 못한 데 있다.
지구적 차원의 시장과 정부 사이의 긴밀한 협력의 차원을 강조하면서 G20의 출현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것은 국제정치의 역학관계를 너무 단순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비록 ‘자본주의 4.0’이 계속 진화하여 새로운 환경에 부합하는 새로운 전망을 제시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다가올 지구적 차원의 복합 위험을 너무나도 일면적으로만 바라보고 있다.
오늘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지역, 국가, 계층, 세대, 인종, 종족, 종교 사이의 충돌과 대립을 고려해야만 지구적 차원의 실현가능한 거버넌스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