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102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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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102인
  • 재외동포신문
  • 승인 2011.08.17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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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상대 본지 편집위원

1902년 12월 22일 하와이를 향해서 102명을 태운 개일릭호(Gaelic)가 인천항을 떠난다. 우리나라의 첫 공식 이민선이다. 하와이 호놀룰루 항구에 도착한 날짜는 1903년 1월 13일 아침. 첫 배로 도착한 이민자는 오아후(Oahu) 섬에 있는 와일루아(Wailua) 농장 사탕수수 밭으로 보내진다. 새벽 4시 30분 기상. 오후 4시까지 점심시간 30분외에는 노동을 계속한다. 화씨 100도 더위에서 구부린 채 노동하며 안 움직이면 채찍이 날아온다. 일당은 남자 67센트, 여자 50센트. 월수입 16~18불 정도다. 막사는 흙바닥. 이민초기에 ‘혐오민족 1위’로 뽑히는 수모를 당하면서 우리 동포는 한숨과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우리 민족과 서양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런 와중에서도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은 자기네 수입의 4분의 1 이상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는다.

1903년 한 해 동안 모두 16차례의 선편에 1,133명이 오고 1904년에는 33차례의 선편에 3,434명, 그리고 1905년 7월초까지 16차례의 선편에 2,659명이 도착한다. 모두 7,226명이 지상낙원, 꿈의 땅이라고 불리는 하와이에 속속 도착한다. 13대 1의 비율로 대부분이 남자다. 이들이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노동효과에도 나쁘다고 하여 한국에서 신부를 데려오기로 한다. 먼저 사진교환이 있었다. 사진에서 고국의 배우자 후보가 마음에 들면 신랑이 여행경비로 2백 불을 보낸다. 그래서 사진신부(Picture brides) 1,056명이 오게 된다.

사진에서는 20대 청년인 줄 알았는데 와서 보니 신랑이 50대 중년이라 19세의 신부가 통곡하는 해프닝도 벌어진다. 이 사진결혼은 1924년 5월 15일 ‘동양인 배척법안’이 통과될 때까지 14년간(1910~1924) 계속된다. 그사이 영남출신 신부 951명이 들어오고, 상해를 거쳐 북한출신의 신부 105명이 미국본토로 건너온다. 이들 사진 신부들은 비교적 교육수준이 높았고 남편과의 나이차이 등 현지 생활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자녀교육에 남다른 열의를 보인다. 가정이 생기면서 동포사회는 아연 활기를 띤다. 이들은 하와이에서도 조상의 신위를 모셔 놓고 제사를 지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일본이 반대하여 우리나라 미국이민이 중단된다.

1620년 11월 21일. 청교도 102명을 태운 메이플라워(Mayflower)호가 미국 동북부에 도착한다. 우리나라 첫 이민자 숫자와 똑 같은 102명이다. 영국 플리머스(Plymouth)를 떠난 지 66일 만에 그들이 도착한 곳은 여태까지 경험 못 해본 낯선 공간이었다. 그들은 이곳도 플리머스라고 명명한다. 미국은 1492년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하고 130년이나 방치했던 땅이다. 이 버려진 땅에 종교의 자유를 찾아 그들이 온다.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탄압을 피해 온 그들은 ‘필그림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들은 혹한, 척박한 토지, 인디언 습격으로 인해 첫 해 겨울에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는다. 그나마 우호적 인디언으로부터 그 땅에 맞는 곡식재배법을 배워 다음 해 곡식을 수확 할 수 있게 된다. 첫 추수를 한 후 그들은 모여서 감사예배를 드린다. 이 날이 미국 ‘추수감사절(Thanks giving day)’의 기원이 된다.

우리나라 모든 교회가 이 날 추수감사절 예배를 본다. 왜 미국역사의 산물인 이 날이 우리나라 교회행사가 됐는지 필자는 이해가 안 된다. 미국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그런가? 차라리 추석 날 ‘한가위 감사예배’로 대체하는 건 어떨까? 청교도들은 일행의 절반 이상이 죽는 아픔을 통해 엄청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들은 입는 옷, 사는 집, 말 타는 법, 총 쏘는 법, 모든 게 영국식으로만 해 왔는데 새로운 곳에서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이때부터 그들은 ‘탈(脫) 영국’ 작업을 벌인다. 검은 긴 옷을 벗어 던지고 우리가 서부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셔츠에 조끼를 입고 총도 빨리 쏘기 위해 허리 아래 넓적다리에 찬다. 말도 유럽의 반동 식을 버리고 인디언 식으로 타기 시작한다. 미국은 이때부터 유럽식 전통을 버리고 자기네가 필요한대로 사는 방식을 채택해 나가기 시작한다. ‘새로운 공간에선 새로운 질서’라는 미국 고유의 특성이 생긴 것이다.

플로리다주 올란도(Orlando Flrorida)의 ‘디즈니월드(Disney World)는 LA의 디즈니랜드(Disney Land)보다 3배쯤 크고 몇 십 년 후에 지은 거라 시설이 더 좋다. 만들어 놓은 공룡, 코끼리 등의 움직임도 더 자연스럽다. 디즈니월드는 네 개의 주제공원으로 나뉘어 있는데 매직킹덤(Magic Kingdom), 에프콧센터 (Epcot center), 디즈니 헐리웃(Disney Hollywood), 애니멀 킹덤(Animal Kingdom)이다. 그 곳은 어른도 모든 걸 잊고 동심의 세계로 들어가게 만드는 마술이 있다. 나는 아들놈에게 보여주기 위해 구경을 시작한 건데 나중에 보니까 내가 더 즐기고 있다. 유럽인 같으면 유치하고 창피해서 못 할 짓도 미국인은 서슴없이 한다. 나는 그런 사고의 대표적인 결과가 디즈니월드가 아닌가 생각한다. 디즈니월드의 슬로건은 “당신이 꿈꿀 수 있으면 실현할 수 있다(If you can dream it, you can do it)”이다. 필자는 미국의 이런 성향이 ‘탈 영국’을 경험하면서 생긴 저력이라고 생각한다.

‘탈 영국’을 경험한 영국이민자 102명은 개신교 백인(WASP) 국가인 미국을 만들고 ‘독립운동’의 요람이 된 초기 우리 동포 '이름 없는 선구자' 102명은 해방 후 우리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세월이 흘러 이제는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