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병헌 선생 별세
상태바
고 박병헌 선생 별세
  • 이현아 기자
  • 승인 2011.03.11 19: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7일 별세…동포사회 애도
“생각해 보면 치열하게 도전하고 또 성취하는 삶이었다. 좌절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목표를 달성해내는 행운의 일색이었다.”

고 박병헌 민단 상임고문이 2009년 남긴 말이다.

재일민단의 정신적 지주 박병헌 선생이 지난 7일 향년 83세의 일기를 끝으로 별세했다.

1928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고 박병헌 선생. 1939년 도일한 그의 일생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끝없는 열정과 사랑으로 가득하다.

“전쟁 말기 공습을 피해 잠시 거처를 군마 현으로 옮겼는데 거기서 해방 이듬해 보수적인 청년단체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 지방 조직에 관여하게 됐고, 이로써 민족단체 운동가로서의 긴 여정을 시작하게 됐다.”

고 박병헌 선생은 이렇게 십대 시절을 회상했다. 격동의 30년대 민족운동에 눈을 뜬 그는 1946년 10월 결성된 민단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며 동포사회의 한 가운데로 걸어 들어간다.

1949년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한 그는 재일한국학생동맹에 가입해 재일동포 청년들과 교류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혈서를 써 동포 청년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던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162명의 재일동포 청년들이 구국전선에 동참하자는 방침을 세우고 재일한교학도의용군을 결성했다. 박병헌 선생 역시 재일학도의용군 1진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다.

이후에도 조국의 중대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박병헌 선생은 의미있는 행보를 보였다. 1985년과 1987년 두 차례에 걸쳐 민단 단장을 역임한 그는 오늘날 한인회장대회의 모태가 된 해외한민족대표자협의회의 출발을 함께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둔 모국에 지원하기 위한 525억원 기금 마련도 그의 손을 통해 이뤄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고 박병헌 선생이 의미를 두고 실천한 부분은 경제 분야였다. 1973년 구로공단에 전자부품 회사인 대성전기를 설립한 그는 1970년대 후반 재일한국인본국투자협회 설립을 주도했으며 1980년대 초반 신한은행 출범해도 적극 참여했다. 기업인으로서의 활동을 통해 모국 경제에 기여하겠다는 것은 초기 재일동포 경제인들의 중대한 신념이었다.

회사 경영 뿐 아니라 민주평통자문위원을 비롯 신한은행 이사, 중앙대학교 이사, 한국복지재단 이사, 제일스포츠센터 이사 등을 역임한 그의 행적은 한국과 일본을 활발하게 오가며 인상깊은 방점을 찍고 있다.

“이제 우리 세대에 못 이룬 꿈들을 후세들이 이뤄가기를 바란다”고 고백하던 고 박병헌 선생. 그는 1995년 본지와의 만남을 통해 “남은 일생도 지금까지처럼 주어진 나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조국과 재일동포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소망을 밝히기도 했다.

질곡의 시대를 민족과 함께 하며 오로지 조국에 대한 헌신을 첫째의 덕목으로 꼽았던 고 박병헌 선생의 죽음에 700만 동포사회가 함께 애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