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은 안중근 의거를 어떻게 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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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은 안중근 의거를 어떻게 보았을까?
  • 김미란 기자
  • 승인 2011.01.24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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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중국신문 안중근의거 기사집’ 발간
1909년 10월 26일, 만주를 분할하기 위해 러시아 대장대신과 하얼빈에서 회담을 갖기로 한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의사에 의해 처단된다. 이 사건은 열강의 침략과 압박 아래 온갖 고난을 겪은 중국인에게 큰 충격을 줬다.

당시 중국인들의 인식을 반영하는 중국신문들은 안중근의사의 의거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독립기념관(관장 김주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안중근의사 의거 101주년을 맞아 ‘중국신문 안중근의거 기사집’(국배판 700면)을 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 제27집으로 발간했다.

중국에서 간행됐던 17종의 신문과 1종의 잡지에서 발췌해 만든 이번 자료총서는 안중근 의사 및 의거, 의거에 대한 평가, 안 의사 재판 및 형 집행 전후 상황, 각국의 반응 등을 수록했다.

특히 과거 안중근 의거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 연구가 주로 혁명파들의 긍정적인 반응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에는 혁명파와 정치적 입장이 달랐던 입헌파의 부정적, 중립적인 인식에 대해서도 수록해 그 의미가 크다.

자료집에서 ‘암살’을 혁명의 주된 수단으로 여기는 혁명파가 간행한 신문인 ‘신주일보(神州日報)’·‘민우일보(民吁日報)’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평화적이고 온건적인 개량주의를 지향하는 입헌파가 간행한 신문‘신보(申報)’·‘시사보(時事報)’·‘화자일보(華字日報)’ 등은 부정적이거나 중립적인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이 중국에서 발간한 신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다루면서 안중근 의거를 ‘암살행동’으로 규정하고 비난한 반면 중국의 대부분 언론들은 안 의사를 중심으로 다루면서 거사일로부터 1910년 3월 26일 순국일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관련 보도를 내보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이번에 발간한 자료집은 안중근 의거에 대해 다양하고 방대한 자료를 수록하고 있어, 그 사료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안중근 의거가 세계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는데도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