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세계 최초 3단 회전식 전광판을 한국인이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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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세계 최초 3단 회전식 전광판을 한국인이 세우다
  • 최웅섭
  • 승인 2010.06.1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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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한인무역협회 바쿠 지회장 최웅섭

결론부터 말하자면 처음 계약 단계부터 3단 회전식 전광판은 100%로 자신하기 어려웠다.

이유인즉 아직까지 회전 전광판이 세계 어디에도 없고 기술적인 노하우가 없고 전광판 자체가 너무 크고 높이가 무려 39미터는 된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프로젝트 제안서(디자인, 도면설계, 회전체 설계등)를 제출하고 무려 한달 동안 기술 검토회의를 거쳐 이 나라의 윗 선에서 결정이 나는데 무려 1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1달 동안 수많은 회의와 회의를 거쳐 반신반의 하는 이들을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매일 아침 10부터 밤 늦게 까지 미팅에 미팅 수 많은 질문 공세, 의심의 의심, 과연 가능할까? 이들을 설득하는데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이들과 미팅에서 단 한마디의 불평과 신뢰를 잃어버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들은 우리의 행동과 언어의 일치를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드디어 윗 선에서 설치해도 좋다는 결정을 듣고 2010년 2월 28일 계약했다.

계약을 하는 날 이 기쁨, 이 환희 어디다 말할 수 있으리요? 이전에 설치한 체육관, 운동장에 이어 3번째 전광판을 수주 받는 이 굉장함,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한국의 수많은 대기업, 중소기업이 들어 와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아제르바이잔에서 한 개인이 엄청난 프로젝트를, 그것도 입찰을 통해서, (이것을 위해 5개 국가가 입찰에 응했음. 미국, 러시아, 중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입찰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윗 선에서 나에게 주라고 지시가 내린 사실은 그 동안 쌓아온 신뢰가 있었고(2번의 전광판이 성공적이었음을 인정하는바), 이 신뢰를 바탕으로 나에게 프로젝트를 제출하라고 말한 것은 바로 바쿠 엑스포 프로젝트를 나하고 계약하겠다는 성공 예감이었다.

한국의 수많은 기업들이 이곳에 와서 자리를 잡기 위해서 한국 정부의 도움까지 받아가면서 사업을 시도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되지 않는 이곳 아제르바이잔, 수많은 기업들이 자리를 잡기 위해 분투를 하지만 힘이 드는 이곳, 하지만 나는 드디어 3번째 전광판을 계약하지 않았는가?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일을 해낸 것이다.

기업이라면 기업에서 행정지원, 인적자원 지원, 생활 환경에 대한 지원 그리고 더 나아가 이곳에 진출한 대사관의 지원도 음으로 양으로 받고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나는 어느 누구의 도움 하나 받지 않고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단 하나 신뢰라는 것을 무기 삼아 세계 최초 3단형 회전체 전광판을 계약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나의 철학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1. 이들을 철저히 신뢰한다.
2. 이 나라 언어를 철저히 구사한다.
3. 이슬람 문화를 이해하고 문화를 바탕으로 비즈니스를 한다.
4. 시간을 철저히 준수한다. 현지인이 아무리 늦어도 기다린다..
5. 절대로 모든 것에서 이 나라를 무시하지 않는다.
6. 한국이 최고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철학을 가지고 지금까지 사업을 해왔고 이번 일도 이 철학에 충실했다.

그 결과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환희의 기쁨도 잠시 일정이 문제였다. 이 분분 때문에 계약 일정이 미루어진 이유이기도 했다. 이 정부에서 기술적인 부분도 부분이지만 과연 일정을 맞출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우리는 일정을 제시하고 만약 일정이 늦어지면 비행기로 운송하고 또한 일정을 못 맞추면 페난티(계약금의 15%)를 받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세계 어느 나라도 할 수 없는 회전체 전광판을 만드는 것이다. 전광판 자체 무게만 해도 무려 220톤이 넘는 것을 지장 10m 위에서 3개의 피라미드형 전광판이 다양한 각도에서 서로 다르게 돌아 가도록 설계를 해야 하고 각각 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것을 설계하고 제시했을 때 이 정부에서와 윗 선에서도 믿지를 안았다. 사실 나도 돌릴 수 있을까? 하고 반신반의 했다. 하지만 시작도 안하고 포기하느니보다 일단 해보자라고 마인트 콘트롤하고 길을 찾으니 답이 나왔다.

회전체는 타워 크레인에서 답을 찾았고, 타워크레인 공장들을 찾아 다녔고 마침내 제작이 가능한 공장을 찾아 360도 3개 전광판을 돌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정부에 밀어 부친 결과 계약이 성사 됐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2010년 2월 28일 계약을 하고 5월 20일까지 설치 마감하기로 하고 최종 계약을 했다.
계약 조건은 계약과 동시에 60%를 선수금으로 받고, 선적 전 20%, 선적 후, 15%, 최종 마무리 후 5% 조건이었다. 계약과 동시 60% 선수금 조건은 그 동안 두터운 신뢰 속에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아마도 세계 어디에도 선수금을 60% 주는 나라, 기업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부는 나를 신뢰하고 이번에도 밀어줬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전광판을 설치하기 위한 각종의 원자재들을 발주를 하는 일이다.

발주는 현지와 한국에서 하기로 했다.

전광판이 세워질 콘크리트 골조는 현지 업체 입찰을 받아서 주기로 하였다. 전광판이 세워질 콘크리트 구조물은 지하 골조와 상단 부분으로 나누어 지는데, 지하 6m 지상 10m의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이 구조물을 세우기 위해서 철근이 900톤 세멘트(30)2,000㎥가 들었다 .

전광판을 세울 주 기둥은 높이 10m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지름이 3.2m에 콘크리트 두께가 무려 50cm이며 이 구조물은 지진 9도와 바람 풍속45㎧에 맞추어 설계됐다.

한국에서 설계한 구조계산을 현지 건축법에 맞추어야 한다고 해서 현지에서 이를 위해 지질조사와 설계 구조 계산을 병행하였고 또한 현지의 건축법에 맞추어서 작업을 시행하였으며, 주 정부의 철저한 감독과 감리를 받았다.

하지만 건축회사의 기술적인 결함으로 주 기둥 밑면 3미터 지점 세멘트 타설을 잘못해 철거해야 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그뿐만 아니라 남은 7m 주 기둥 세멘트 타설시 거푸집이 터져는 일도 발생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 주 기둥이 완성되었는데 한국에서 물건이 도착하기 전까지도 완성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것은 현지 건설업체의 공사 기술 수준을 파악하지 못한 실수였고 철골 구조물을 생각지 못한 실수였다.
수많은 난관을 거친 가운데 드디어 주 기둥이 주 정부의 감리와 강도 측정을 거쳐 완성될 수 있었다.

이제 전광판과 철골 구조물, 회전체, 전기 문제를 발주하는 문제가 남았다. 이를 위해서 한국으로 날아갔다. 전광판 발주는 이전에 같이 일을 한 회사에 발주를 주기로 하였고, 전광판을 조립할 철골 골조 회사, 전광판을 회전시킬 회전체 제작업체, 전기 업체 등을 발주 계약을 했다.

각 회사에 발주를 줄 때 일정을 맞출 수 있는가에 최대한 목표를 두었다. 제작기간 1달(3월1-3월말 까지) 운송기간 1달(부산에서 이란 바안드라 바아스를 통해 바쿠 까지 운송기간 최대 30일 잡았다. 부산에서 이란까지 21일, 이란에서 육로 수송 4일, 통관 하루, 여유 5일) 그렇게 되면 20일 만에 전체 전광판을 조립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밀어 부치기로 결정했다.

사실 전광판 1단(3면체)을 조립하는 데에는 최소한 7일 이상이 걸리면 안된다고 판단하고 일정을 몰아 부쳤다.

전광판이 3단이지만 규격이 가로 12미터 높이 9m터 짜리가 총 9면이다. 1단(3면)이 전체가 조립이 되면 무게만 약 75톤이 넘는 무게가 된다.

회전 전광판의 핵심은 회전체이다. 사진에서 보듯이 2개의 모터로 구동이 되고, 원통(우리는 이것을 깡통이라 부른다) 아래에 회전기아를 붙이고, 기아 위에 있는 깡통 위에 삼각대 빔을 붙여서 만드는 것이다. 1단계 구조물이 완성이 되면 기본 골조에 전광판을 붙이기 위한 골조를 붙여서 1세트를 조립 완료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발주를 완료하고 현장에 돌아와 지하 구조물을 완공하는데 참으로 어려운 고비 고비를 넘겼다. 현장에서 우리만 독단적으로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 일정이 같이 돌아가는 것이기에 지하 골조 문제를 완성하는데 많은 문제점과 현장의 비 협조로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것이 전광판을 돌리는 회전체 여기에 철골 골조를 붙여 전광판을 붙인다.

땅 파기부터 철근 작업, 콘크리트 작업 어디 하나 손발이 맞는 데가 없었다.

지상의 주 기둥 작업에 철근 작업을 하고 콘크리트를 타설하기 위한 거푸집을 만드는데 목공들이 기술이 없어서 철거를 수 없이 반복을 했다.

또한 세멘트 타석이 잘못되어 철거를 몇 번, 기둥의 강도가 제대로 나오는지 강도 측정을 수없이 하고 주 기둥에 철판으로 보강을 하고 하는 등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4월말 전에 도착하기로 한 컨테이너들은 도착이 지연되고 그러므로 인해서 한국에서 인력 파견이 지연되는 등 수 많은 난관 난관들이 산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들어오는 물량만 40피트 짜리 컨테이너 23개 비행기로 운송되는 화물이 수백 톤 제 날짜에 들어와야 하는데 각 발주한 회사들의 사정으로 선적이 늦어지고 그로 인해서 설치에 대한 불안감이 너무 심하게 밀려 왔다.

과연 일정은 맞출 수 있으며 또한 전광판이 돌아갈까? 한국에서 일부분의 회전체(회전체 자체무게만 30톤)만 확인을 했는데 과연 45톤의 전광판 골조를 전부 붙여서 돌아 갈수 있을까? 하는 등의 불안의 연속이었다.

어쨌든 일정이 지났지만 속속히 들어오는 컨테이너들, 컨테이너들을 하역하는데 만 무려 5일이 걸렸다.

장비가 하역이 되고 조립을 위하여 회의를 하는데 하나같이 1세트를 조립하는데 최소한 15일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3세트를 조립하는데 45일 그러면 앞으로 남은 17일에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일부에서는 철수하겠다고 하고, 불가능하다고 하고 참으로 어떤 대안이 없이 막막한 바다에 떠있는 심정이었다.

크레인3대가 동원되어 조립되고 있는 장면
각 회사의 리더들을 불러 하소연과 부탁을 했고, '한번 한국인의 긍지를 가지고 해 봅시다.' '할 때 까지 해보자'고 격려도 하면서 시작된 조립작업은 각 파트별로 일사불란하게 조립되어 갔다.

5월3일부터 한국인 25명 현지노동자 10명 크레인 3대 지게차 2대 트레일러 1대 등 이외도 많은 장비들이 동원되어 불철주야 가리지 않고 조립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기본만 조립하고 나머지는 공중에 매달리어 조립을 하기로 했으나 일정상 모두 지상에서 완벽하게 조립하여 크레인으로 들어 올리기로 했다. 문제는 이것을 들어 올릴 수 있는 크레인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수 많 곳으로 크레인을 찾아 다니었으나 찾지 못하고 힘들어 할 때 터어키의 한 회사가 300톤 크레인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갔다.

그 회사는 터어키의 이즈미르라는 터어키의 3번째 도시인데 그곳에서 와서 이곳에서 중장비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대화 중에 아내가 이즈미르에 살았는데 이름이 데리야였다고 하자 사장이 자기 이름이 데리야라고 하면서 명함을 내 밀었다.

더 없는 지인을 만났고 최대한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을 받았다. 아내의 이름이 큰 도움이 되었다.

크레인으로 들어 올리기 위한 현장 답사가 이루어 졌고 주 기둥으로부터 최소한 1단 2단까지 80톤은 들어 올릴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이런 구세주가 어디 있단 말인가?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돈은 문제가 아니었다. 크레인은 300톤짜리인데 보강을 하여 400톤 정도의 크레인으로 개조되었다.

회전체 전광판은 자그마치 길이만 따져도 높이 1m 길이 120m나 되고 모듈만 12,500개 그리고 각종의 철골들로 조립되어 가고 있었다. 여기 들어가는 모든 재료들은 전부 한국에서 만들어 온 것들이다.

드디어 1단이 조립이 끝나고 보니 본인도 실제로 사진만 보다가 조립되어 있는 전광판을 보고 과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한 건물 연상시키기에 한 점도 부족함이 없었다.

2단을 조립한 모습과 주 기둥 모습 사람의 크기가 대조된다.
1단이 조립됨과 동시에 한쪽에서는 2단을 준비하기로 했다. 일정단축과 크레인 경비를 줄일까 하고 생각했으나 원하는 데로 되지 않았다.

2단 조립은 그래도 조금은 쉬었다. 이유인즉 1세트를 조립하더니 이제는 요령들이 생겨서 일하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작업이 진행이 되면 5월25일까지는 끝날 것 같았다. 아직 1세트도 들어 올리지도 못했지만 은.

1단은 조립이 끝나서 옥상에서 마무리하고 옆에서는 2단 조립과 동시에 전광판을 조립하는 모습
작업 일정은 1세트를 마무리 하는 사이 2세트를 조립하고 2세트를 조립하는 사이에 3세트 회전체를 준비하는 체계로 작업을 진행했다. 현장의 작업공간이 좁지만 최대한 공간을 확보하면서 일정을 몰아 부쳤다.

드디어 1세트를 들어 올리기 위한 준비에 들어 갔다. 하지만 주 기둥 안전이 문제였다. 할 수 없이 안전 진단을 재 요청하였고 올려도 된다는 진단을 확인하고 크레인회사를 불렀다.

크레인이 도착하였는데 하루에 2세트를 들어 올리는 데는 무리라는 것이다. 한 장소에서 2세트를 들어 올릴 수 없고 크레인을 재 설치를 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1단과 2단이 조립되어 가고 있는 모습

300톤 짜리 크레인이 들어 오고 있다.
사실 크레인을 재설치 하는데 무려 2-3시간이 소요됐다.

처음 1세트는 들어 올려 주 기둥에 설치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2째 세트를 설치하기 위해 크레인을 자리잡고 들어 올리는데 크레인이 바닥의 무게에 견디지 못하고 땅바닥이 갈아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로 인해서 땅 바닥을 보강하고 철판을 보강하는 등 작업으로 하루에 1세트로 만족해야 했다.

3단까지 들여 올려진 광경과 밑면의 광고판

완성되지 않은 전광판 3세트를 공중에 부양을 시켰다. 참으로 과관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물론 주 정부 자체도 5월 20일까지 마무리 하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주 정부 담당자가 나를 불러서 5월말 까지 전시회 전날까지 1세트도 좋으니 차질 없이 준비만 하여 달라고 하소연 했다. 너무 무리하여 사고 내지 말고 이것은 윗사람이 전하는 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하루는 장관이 방문하여 무리하지 말고 1세트 만이라도 전광판을 비쳐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장관 앞에서 5월28일 까지 3세트를 보여주겠다고 호헌 장담했다. 장관은 몇 번이고 정말이냐고 물었고 무리수를 두지 말라고 했다.

5월28일에 영부인이 현장에 방문하기로 되어 있다고 누군가 귀 틈을 해줬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보여주어야만 했다. 이유인즉 다음의 2건의 프로젝트가 머리에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5월27일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이 다녀 갔고, 그들에게 브리핑하면서 28일 완벽하게 가동하겠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그들은 내 말은 믿는 기색이 전혀 아니었다. 우리는 전광판을 조립하는데 더 가속도를 붙였다.

그러나 직원들은 한 사람도 불평이 없이 나의 리더십에 따라 주었다. 드디어 28일 3세트가 조립되어 겉에서 보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영부인이 방문하여 전광판을 보고 너무도 좋아서 1개의 프로젝트를 선물했고 이어서 또 하나의 바닷가 프로젝트를 주었다.

영부인이 방문 뒤 2시간 뒤에 예정도 없던 대통령이 방문이 이루어 졌다. 장관이 브리핑에서 한국의 기술자들이 와서 거의 마무리 되었고 행사 일에 사용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보고 됐다.

우리의 작업은 착실히 계획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전광판은 조립이 28일 끝이 났고 이제는 시험 가동하는 일만 남았다. 전광판의 12,000개나 되는 모듈을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 일이 남았다. 전광판 시스템을 위해서 4일 동안 한잠도 안자고 뜬 눈으로 시스템을 가동해 드디어 9개 면이 30일 모두 가동되어 화면이 표출됐다.

모두가 놀랐다. 우리도 놀라고 현장의 사람들도 이 정부의 관계자들도 모두 놀랐다.

사실 통상적으로 이런 사이즈 같으면 시스템 점검하는데 한국에서나 다른 나라에서는 1면당 15일씩 한다. 문제는 1면이 아니고 무려 9개 면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전광판 화면 비추는데 전 힘을 기울였다. 나머지 마무리는 행사가 끝나고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영부인과 대통령이 확인했고 장관이 너무나 기뻐하는 모습이 나의 고생함을 잊어 버리게 했다.
장관은 "과연 한국이구나! 어림도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일을 해 내다니! " 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세계 최초의 회전체(340도) 전광판
세계 최고 높이의 전광판
세계 최고의 픽셀(17mm)
세계 최대의 전광판
세계 최초의 삼각형 전광판
세계 최고의 화질
세계 최고, 최초의 지하 6m, 주 기둥 10m의 전광판
세계 최고의 일정 단축
세계 최고 지진 9도 설계

세계 전광판 역사상 세계 최고, 최초라는 모든 수식어가 바쿠 엑스포 전광판에 붙어 있다. 각각 3개의 전광판이 340도씩 각각 회전은 물론이고 3개의 화면이 일치 될 시에는 3면의 화면이 1개의 화면처럼 영상이 노출되기도 하며, 모든 시스템 운영은 운영자가 준비해 놓은 콘텐츠를 자동으로 중계하며, 카메라가 전광판을 추적하여 시스템, 장비 가동 여부를 확인하여 운영자에게 알려 주도록 설계됐다.

이 전광판은 각종 코덱의 동영상은 물론이고, 각종 이미지 그리고 생방송 중계는 물론 광고를 할 수도 있으며, 365일, 24시간을 돌려도 무려 10년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지난날의 시간이 주마등 같이 지나갔다.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서 수많은 어려움들이 있었건만…

6월1-6월4일 까지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세계가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세계 석유 가스 전시회가 열리는 날이다. 이 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고 자연히 전광판이 회전하는 것을 볼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이 정부에서 엄청난 예산을 들여 무역센터를 새로 건축하였고 그 중앙에 아제르바이잔의 랜드마크라 해도 손색이 없는 세계 최초의 회전 전광판이 세워진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24개 국가에서 참가한 아주 성대한 전시회였다. 그곳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한국의 IT기술에 놀랐고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이색 3각형 회전 전광판에 사진을 찍느냐고 정신들이 없었다.

1면이 일치되어 돌아가면서 1화면을 보요주고 있다(좌) 완공된 전광판 앞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한 컷(우)
모두가 메이드 인 코리아를 하면서 엄지를 보여줄 때 지난날의 힘든 것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또한 현장에 나와 같이 작업에 몰두한 한국인들, 한국을 떠나 언어가 안되고 먹는 것, 일하는 것 모두가 생소한 곳에서 힘들어 했던 현장의 한국인들,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하물며 나야 오죽하겠는가?

분수가 올라온 전광판 모습

이곳에 한 개인으로 와서 주 정부의 프로젝트를 하나도 아니고 벌써 3번째 이루어 냈다는 것에 자부심과 긍지가 눈물을 흘리게 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앞으로 2개의 프로젝트가 바로 이어서 시행이 계약이 된다는 사실에 흥분을 멈출 수가 없다.

오직 신뢰 하나로

행사당일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고 대통령이 입장하고 다시 한번 세계 속의 유일한 회전 전광판은 수 많은 3부 요인과 주 아제르바이잔 외교관들과 이번 행사에 초청된 모든 사람 앞에 당당하게 서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대통령이 현관을 들어오시면서 전광판을 보시는 모습에 마음의 뜨거움과 감동을 느꼈다.

이것을 나 최 웅섭이 만들었다고…

물론 조금의 실수도 있었다. 당일 전기의 사정이 좋지 않아 3층 부분을 돌려주지 못했다. 아쉬움이면 아쉬움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미 입장시 확인을 했으므로 문제가 되지 못했다.


나는 현장에서 또 하나의 꿈을 만들고 있었다.

앞으로 프로젝트는
1. 높이 37m의 예술적 전광판
2. 높이 50m의 바다에 세워지는 분수와 일체형 전광판
3. 밍게체이브 카누경기장 전광판

나는 이 사업을 하면서 이 나라의 희망을 보았고 또 하나 여기에서 얻은 분 깃의 일부를 이 땅의 사람들에게 내가 운영하는 국제 비 정부기구를 통해서 되돌려 줄 수 있음에 다시 한번 감사했다.

나눔과 기여를 지금까지 삶의 목표로 살아왔는데 타국에 와서도 이룰 수 있다는 것에 긍지를 느끼었다.

이 일을 시작하기 앞서 5대 그리고 중반쯤에 피난민 초중고등학교에 컴퓨터 5대를 기증하였다. 이 곳에서 돈만 벌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같이 공생한다는 신뢰를 만들어 가고 싶었다.

피난민 학교에 컴퓨터 기증장면
세계 최초의 이색 전광판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수 많은 눈물과 불협화음, 고생의 고생이 있었고, 어려운 난관을 난관으로 여기지 않고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일해 준 각 회사의 직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말없이 지휘에 따라준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성공했다고 본다.

나는 또 하나의 이정표를 만들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꿈을 꾼다.

나는 도도새를 싫어한다.

이유인즉
1. 유순했다.
2. 적이 없었다.
3. 날지 못했다.

이 이유로 도도새는 1681년에 세상에서 멸종됐다.  나는 도도새 처럼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 독수리 처럼 날개치고 올라가는 피곤치 아니하는 독수리의 심장을 품기 시작했을 때 나의 비전은 이루어 졌다.

앞으로 남은 2개의 프로젝트 말고 또 어디에 전광판을 세울 데는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