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만 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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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만 탐하는…”
  • 강성봉 기자
  • 승인 2010.05.24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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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이 유학을 결심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해는 1902년이다. 갤릭호가 한인 노동자 86명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풀어놓기 햇수로 1년 전이다. 달 수로는 정확히 세달전이다.

도산은 1902년 9월 3일 밀러 목사의 주례로 서울 제중원(세브란스병원)에서 이혜련여사와 결혼하고 다음날 부부 동반으로 인천항을 출발, 일본 동경에서 1주일을 체류한 후 도미해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갤릭호는 1902년 12월 22일 121명을 태우고 제물포항을 출발,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다.121명중 86명만이 상륙허가를 받아 그로부터 본격적인 미주한인 이민역사가 시작된다.

도산이 당도했을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이미 한국인들이 여러 명 살고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주로 인삼을 파는 행상이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여러 학교에서 입학을 거절당했던 도산이 겨우 한 학교의 입학을 허락받아 공부를 하러 다니던 어느날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번화가를 걷고 있을 때, 두 사람의 한국인이 서로 상투를 맞잡고 싸우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신기한 듯이 이를 구경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미국에 있는 중국인들에게 인삼을 파는 인삼 장수였는데, 서로 맡은 구역을 침범했다고 시비가 벌어져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도산이 싸움을 말리려고 하자 두 사람은 오히려 “당신이 뭔데 우리 일에 끼어드느냐”고 도산에게 화를 냈다.

당시의 우리 동포들은 나태하고 책임감이 없어 미국 사회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업신여김을 많이 당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난 후 도산은 공부보다 더 시급한 일이 동포들에게 성실 근면하고 알뜰한 생활을 하도록 지도 계몽하는 일이라 판단하고 학업을 포기한다.

도산은 매일같이 동포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마당을 쓸고 유리창을 닦으며, 심지어 화장실 청소까지 해준다. 처음에는 모든 동포들이 도산을 이상하게 여기고 냉담해 했으나 곧 그의 정성을 알게 된다.

도산의 감화를 받은 동포들이 어느 날 도산을 불러 “당신의 생활은 우리가 책임지겠소. 이제 당신은 동포들을 위한 사업에만 전념해 주시오” 이렇게 부탁한다.

그 이후 도산은 요즘말로 전업 활동가가 되어 동포들의 생활개선과 민족독립을 위한 활동에 매진할 수 있게 된다.

도산은 1903년 9월 23일 재미동포의 단결과 계몽을 위해 한인친목회를 조직, 회장에 피선됐고, 1905년에는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공립협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이 된다.

공립협회가 바로 미주한인회총연합회가 자랑스럽게 오늘날 미주총연의 시작으로 협회 연혁에 기록하고 있는 ‘대한인국민회’의 전신이다. 미주총연은 학업을 포기하면서까지 동포들을 위해 헌신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을 정신적 지주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도산은 1907년 귀국해 신민회를 조직하는 등 망해가는 나라를 지키려 혼신의 힘을 기울여 보지만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여지가 없게 되었다고 보고 1910년 해외 망명의 길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 모스크바, 베를린, 런던 등을 경유하여 1911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다.

1912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산은 공립협회를 확대 발전시켜 해외 지방총회를 망라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 중앙총회를 조직, 초대회장에 선임된다.

오늘날의 한인회장들에게 도산 안창호 선생만큼의 헌신성과 봉사정신을 요구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얘기이다. 세상이 변하기도 했거니와 대한민국과 동포사회의 발전으로,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제외하고는 도산이 행했던 만큼의 노력과 헌신을 필요로 하는 동포사회의 과제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저곳의 한인회에서 들려오는 선거 관련 불협화음은 한인사회의 미래에 많은 우려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한인회는 미우나 고우나 한인사회의 대표조직이다. 동포사회가 외면해도 한인회를 바로 세우는 것이 한인사회를 바로 세우는 핵심이다.

혹자는 우려하던 것이 현실로 나타났다고도 말한다. 재외국민 참정권이 동포들이 행사해보기도 전에 동포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 기본권리인 참정권이 재외국민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야 헌법에서 정하는 기본적 권리로서 다시 거론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재외선거가 시행되는 과정에, 또 시행되고 나서 동포사회에 가지고 올 폐해를 예방하고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와 관련 재외선거를 담당하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우선 한 가지만 당부하고자 한다.

국회의원 피선거권은 국적회복자에게는 최소 2년간의 유예기간을 두고 부여하라는 것이다. 그게 어렵다면 대통령이 5년 이상 국내에 거주해야 피선거 자격을 갖는 것처럼 국회의원도 최소 2년간의 국내 거주를 자격요건으로 하라는 것이다.

이게 헌법 사항이라 어렵다면 각 정당에 현직 한인회장은 공천하지 않는다는 것과, 국적회복자는 유예기간을 두고 공천할 것을 합의하도록 권고하라는 것이다.

대한인국민회의 맥을 잇고 있는 미주총연 산하 LA한인회장 선거가 파행으로 치달아 해외 한인사회 중 가장 많은 동포가 거주하고 있는 LA 한인사회가 두쪽으로 갈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지하의 도산이 듣는다면 뭐라 하실까?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만 탐하는 한심한 인간들 같으니…”  도산 안창호 선생의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