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 독일 통일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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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일 독일 통일의 날"
  • 나복찬 재외기자
  • 승인 2009.10.13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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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를린 장벽이 열리던 날의 비화

1989년 11월 9일 독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다. 이듬해 독일은 통일됐다. 동유럽 공산정권의 종식을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최근 독일 TV방송국 ARD는 숨가쁘게 진행된 당시 상황을 재조명했다.

1989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동독인 10만 명이 헝가리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하면서 동독은 크게 흔들렸다.

1971년부터 18년간 권력을 휘둘러 온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 동독 공산당 서기장이 10월 18일 전격 사임했다. 호네커의 후계자로 내정돼 있었던 에곤 크렌츠(Egon Krenz)가 후임 당서기로 선출되자, 동독인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11월 4일 동베를린에서 100만 명이 거리로 나와 자유 선거와 신임 크렌츠 서기장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7일에는 빌리 슈토프(Willi Stoph) 총리의 내각평의회가 총사퇴했다. 그는 호네커 당서기와 함께 공산당의 핵심으로 꼽히던 인물이다.

8일 한스 모드로브(Hans Modrow)가 총리에 취임했고, 독일 역사에 한 획을 그은 11월 9일이 밝았다.

모드로브 총리는 서독과 동독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통행 자유화 정책을 결정했고 이 정책은 오전 열린 장관 회의를 통과했다.  회의 직후 집권당인 사회주의 통일당 대변인이자 신임 정치국원인 귄터 사보프스키(Guenter Schabowski)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원래 통행 자유화 방안은 다음 날인 10일부터 비자 발급 형태로 실행될 계획이었지만, 사보프스키 대변인은 구체적인 일정을 발표하는 것을 잊고 말았다.

당시 기자회견에 참여했던 이탈리아 외신 리카르도 에어만(Riccardo Ehrmann) 기자는 준비된 질문을 던졌다.

"효력은 언제 발생합니까?"

대변인은 질문을 예상하지 못한 듯 머뭇거리다 "지금 즉시"라고 답했다.  기자회견을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던 동독인들은 환호하며 곧바로 베를린 장벽으로 향했고, 9일 밤 극적으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다.

에어만 기자는 ARD TV와 인터뷰에서 역사적인 순간을 연출한 "준비된 질문"에 얽힌 사연을 들려줬다.

에어만 기자는 평소 알고 지내던 사회주의 통일당의 한 고위 간부가 기자회견 직전 전화를 걸어 왔다고 밝혔다.

간부는 기자에게  "회견장에서 반드시 법령 이행 시기를 물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올해 80세인 에어만 기자는 요즘도 베를린을 자주 찾는다고 한다. 지난해 독일 정부는 공로를 인정해 에어만 기자에게 '연방 공적 십자 훈장' (Federal Cross of Merit)을 수여했다.


2. 독일 통일 20주년 통일을 이룬 뒷이야기들

1989년 10월 3일,  전 세계 시민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뉴스는 세계 2차대전 이후 동. 서독으로 44년동안 분단되어 있던 독일의 통일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공포의 선을 넘어 동독 지역 사람들이 서독으로, 서독 시민들이 동독으로 그들은 함께 하나의 민족임을 확인하며 서로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독일 시민들이 아니어도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본 사람들도 감동을 하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단절에서 화해로, 분단에서 통일로 가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 유럽에서는 공산국인 폴란드 출신의 카롤 보리티야 추기경이 교황 바오로 2세로 추대되었고, 폴란드의 정치 야당이 폴란드 공산체계에 저항하여 소련 영향권에 있던 국가들에 반국가 운동의 표본이 되어준 사건이 있었다.

또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침공후 패배를 맞이하면서 정치적, 경제적 입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레이건 정부때부터 꾸준히 군비축소및 강경정책을 추진해왔고 나토의 이중결의 실행도 큰 도움이 된 것으로 알려진다.

올해 통일 20주년을 맞이하면서 당시 미국 외교부 장관을 지냈던 James Baker씨는 슈피겔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고하면서 '통일의 기본 원칙은 평화로운 방법이여야 한다'는 원칙이 미국과 소련 양국 사이에 합의되었었다고 밝혔다.

당시 소련은 이미 정치적, 경제적으로 서방과 경쟁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지만, 미국의 도움 없이는 독일 통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베이커씨는 밝히고 있다.

고르바초프도 독일 통일만은 원하지 않았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독일이 강해져서 과거의 역사가 되풀이 될까봐 두려워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통일의 업적을 나눌 인물들은 많이 있지만 당시 소련의 고르바초프와 외무장관 쉐바르드나제(Eduard Schewardnadse)을 들었다.

그리고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와 독일 수상 헬무트 콜도 통일의 주요 기획, 연출자들이다.

소련은 독일이 통일 후에 중립상태를 유지하기 원했지만 독일의 콜 수상은 미국에 통일 독일은 나토 회원으로 남을 것을 보장했다.

당시 콜 수상과 부시대통령은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깊은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고 베이커씨는 말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 미국은 소련을 의식해서 함부로 경거망동을 하지 않은 것도 부시대통령의 조심성 있는 성격 탓이라고 한다.

독일 통일을 역사적으로 완전히 청산하는 zwei-plus-vier-vertrag (서독과 동독,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사이에 1990년 9월 12일에 체결된 조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미국측 외교부에서 회의가 일어나 회담이 성사되지 않을 뻔도 했다.

이 때 당시 겐셔 독일 외교 장관과 베이커씨가 통화를 해서 콜 수상과 부시대통령이 다시 한번 입장을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한다.

통일 기획안에서 주요한 활동을 한 베이커씨는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우려를 이해했지만 동조하지 않았다며, 자신은 독일이 한 말을 지키는 믿을 만한 파트너임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폭력으로 인해 나누어진 민족이 오랜 시기동안 폭력을 이용해 분단이 강요되어 왔다. 그러나 독일은 그 오랜 분단 시기 동안에도 서로 무역을 해왔고, 제한된 조건에서 인적교류를 허용했으며, 전화와 편지 교환도 할 수 있었다.

통일이 오는 시점을 만들기 위해서 오랜 기간동안 두 분단국가가 서로를 인정하면서 도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적시가 왔을 때, 주저하지 않고 그 목적을 위해 모두 힘을 합친 결과가 오늘의 독일을 이룬 것이다.

아직도 수입의 5.5%센트를 통일연대세 명목으로 내야하는 독일시민들의 불만과 함께 구 동독지역에서는 높은 실업률로 동독에 대한 향수를 가진 사람들도 많지만 전체적으로 독일사람들은 통일이 이루어져야 만한 '당연한 일'이었음을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