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한인회가 나아가야 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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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인회가 나아가야 할 길
  • 최선미 기자
  • 승인 2009.05.22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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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제5차 재외동포포럼/김길남 전 미주총연 회장

▲ 김길남(미주총연 전 회장)
지난 15일 방송통신대에서 개최된 ‘2009년 제5차 재외동포포럼’에 김길남 전 미주한인총연합회장이 연사로 나서 ‘전환기 한인회의 과제와 전망(미주한인사회를 중심으로)’을 주제로 발제를 진행했다. 다음은 그 내용을 요약ㆍ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지난 2000년 세계한인회장대회 이후 한인회가 국내 동포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전 세계에는 700여개 한인회가 있다. 그 중에서도 한인회의 출발지인 미국 한인회의 조직, 배경, 현황 그리고 앞으로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현재 미국에는 44개주에 걸쳐 161개 한인회가 있다. 대부분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 이름을 한인회 명칭으로 쓰고 있다.

이에 더해 한국총영사관 관할구역별로 지역연합회, 주연합회가 구성돼 있고 플로리다주연합회, 테네시주연합회 등 미국행정 구역에 따라 주정부를 상대로 교섭하고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주별한인회연합회가 일부 구성돼 있다. 한국인이 살고 있지만 유일하게 한인회가 조직되지 않은 곳은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와이오밍주, 메인주, 미시시피주다.

미주 한인사회는 제1기에서 제4기까지 나눌 수 있다. 1902년 인천에서 이민선을 탄 사람들이 하와이에 정착한 1903년을 기점으로 한일합방이 있었던 1910년까지를 제1기로 본다. 제2기는 1910년부터 세계대전이 끝나고 해방이 이뤄진 1945년까지다.

그리고 제3기가 1945년부터 미국이민법이 개정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민법을 제정해 공식적인 미주이민이 시작된 1963년까지를 말한다. 제4기는 제3기 이후부터 미주한인 이민100년사에 LA폭동이라는 심각한 사건이 있었던 1993년까지를 말한다. 이후 현재까지 미주한인사회는 전환기를 맞고 있다.

제1기인 1903년 한국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한 이후 한인회의 전신이 됐던 단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겠다.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 노동자들은 기숙사에서 집단생활을 했다. 이때 한인들은 ‘동회’형태로 모이기 시작한다.

당시 중국인, 일본인 근로자들이 한국인보다 많은 상황이었다. 이민족간의 충돌을 예방하고 또 농장 주인에게 집단의사를 표하거나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초기 한인회의 기본 목적이었다. 이 시절 출발했던 모임이 신민회, 자강회, 부흥회, 국민공동회 등이다.

이후 1905년 우리나라와 일본의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친목회를 결성한다. 그 이름이 공립협회로 바뀌고 1907년에는 모든 단체들이 통합된 한인합성협회가 다시 결성된다. 그리고 1909년에는 국민회가 만들어진다.

제2기 단체로는 1910년 대한인국민회, 1913년 흥사단, 1918년에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창립된 시카고한인학생회가 있다. 1919년에는 대한독립협회가 구성된다. 또 1921년에는 뉴욕지역 유학생이 중심이 돼 뉴욕한인회(초대회장 조병옥)의 전신 모임을 만든다.

1923년에는 이승만 박사가 하와이를 중심으로 동지회를 만든다. 이승만 박사가 이끄는 동지회와 안창호 선생이 이끄는 국민회는 미국 한인사회 발전에 기여한 한편 한인사회 최초로 분열의 기록을 남긴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제3기인 1949년에 최초로 뉴욕한인회가 발족한다. 이 당시에는 한인 숫자가 적었고 한국정부에서 지역교민들을 체계적으로 홍보하고 관리하고자 초대회장을 남구영총영사가 겸임한다. 그리고 1952년 유창순 전 국무총리가 2대 회장을 맡는다.

1961년에는 근대화된 뉴욕한인회(초대회장 서상복)가 발족한다. 이어 1962년에는 시카고 지역 한인학생회들도 한인회로 형태를 바꾼다.

1963년에서 1993년까지는 제4기, 미주한인사회의 전환기로 본다. 1962년 우리나라 정부 최초 남미로 보내는 이민법이 제정되고 1965년 미국에서도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이민사회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1970년대 지역학생회, 교민회들이 단계적으로 명칭이 한인회로 개편된다. 1972년 남가주거류민회가 남가주한인회로 개명하고 1984년에는 로스앤젤레스한인회로 개명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 15일 동포포럼을 마친 내빈들이 카메라 앞에 섰다.


특히 1992년 4월 29일 LA폭동으로 큰 피해를 입은 후 미주 한인단체들의 기본적인 이념이나 성향이 급격히 변하기 시작한다. LA폭동 전 ’코리안 어소시에이션(Korean Association)’에서 LA폭동 후 ‘코리안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Korean American Association)’으로 개명하고 현지화가 부각된 것. 90년대에는 미국시민권자연맹이 별도로 구성되기도 한다.

한인회의 기능도 시기별로 변화한다. 초기 한인회의 기본 목적은 친목이었다. 그러다가 1960대에서 80년대까지 한인사회가 급격히 팽창하면서 본래 한인회가 가졌던 친목기능은 동창회, 향우회 등으로 넘어간다. 한국인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모이기에는 한인사회의 규모가 너무 커진 것이다.

이후 한인회는 새 이민자들에게 미국생활에 필요한 영어와 컴퓨터를 가르치는 등 봉사단체로 기능한다. 그러나 전문봉사기관이 출현하면서 한인사회에 필요한 봉사업무가 봉사단체로 이관되기 시작한다. 또 이 무렵에는 직능단체도 크게 성장한다.

현재 한인회는 비영리단체로서의 기능과 권익신장을 위한 정치적 역량강화 사이에서 나아갈 방향을 모색 중이다. 특히 LA, 뉴욕, 시카고 등 그 지역 회원수가 10만명이 넘는 한인회들은 중요한 전환기에 놓여 있다.

정리=최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