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총연의 오늘을 만든 사람들
상태바
미주총연의 오늘을 만든 사람들
  • 이석호 기자
  • 승인 2009.05.22 13: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대 회장단의 땀으로 역사를 만들었다”
▲ 미주총연은 미주 전역 약170 지역구를 망라해 만든 단체다. 사진은 제22차 상임이사회 모습.
미주 한인사회에서 가장 확실한 전국적 조직망을 갖춘 단체를 꼽는다면, ‘미주총연’(미주한인회총연합회)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각 지역의 전ㆍ현직 한인회장에게만 정회원 자격을 주는 미주총연은 미주 전역 약 170개의 지역구, 2천여명을 총망라해 조직한 단체. 재외국민 참정권 시대를 맞아 미주총연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도 이러한 조직력 때문이다.

미주총연 홈페이지(www.koreanfedus.org)에 가보면, 미주총연의 역사는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친목회, 공립협회 그리고 대한인국민회(1909년 2월 1일)부터라고 돼 있다. 정신적 뿌리를 우리의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선조들로 두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실질적 ‘제도적’창립은 미주한인사회의 조지 워싱턴으로 불리는 이도영 회장이 ‘미주지역한인회협의회’를 탄생시키면서다.

이도형 회장은 1977년 워싱턴 한인식당에서 미주 13개 지역한인회장들을 모아 협의회를 결성했다. 김정희(뉴욕), 박상익(펜실베니아), 이동필(뉴저지), 오태희(코네티컷), 박노익(인디아나), 이동영(워싱턴 DC)씨 등 한인회장들은 연방정부를 상대해야 하는 단체의 필요성을 느꼈다. 각 지역 한인회가 주정부를 상대하기에 역부족이라고 생각, 단체를 설립했다.

워싱턴한인회장을 세 번 역임한 이도형 회장은 미주총연 설립과 함께 많은 이민자의 직업을 인도하는 활동으로, 지금까지 이민자들의 선배로 남고 있다.

이도형 회장의 기틀은 이후 2대 박해달(시카고) 회장, 3대는 구한모(LA) 회장으로 이어진다. 구한모 회장은 미주지역한인회협의회라는 명칭을 미주한인회총연합회로 개칭하고, 대의원 제도를 열고 전 미주교포 단합대회를 개최하는 등 조금씩 외연을 넓혔다.

김대중 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잘 알려져 있는 박지원 회장은 4대 미주총연을 이끌었다.

5,6대 회장을 맡았던 조도식 회장 시절부터 미주총연의 관심은 재외동포 사회 전체로 넓어졌다. 조도식 회장은 해외한민족대표자협의회를 창립하고, 7대 강익조 회장은 교민청 신설을 추진하고 88올림픽 후원회를 조직한다. 임주택 9대 회장은 재일동포 지문날인 철폐운동에 동참한다.

특히 미주총연에서 재외동포참정권 회복 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을 많이 찾을 수 있다. 미주총연 부회장ㆍ이사장까지 28년간 봉사한 배희철 세계유권자총연합회장, 수석부회장을 역임한 이웅길 한나라당 국제위원회 부위원장 그리고 김완흠 재외국민참정권 회복위원회 위원장 등을 들 수 있다.

대외적으로 미주총연을 알린 인물로는 임용근 회장을 빼놓을 수 없다. 임 의원은 92년과 96년 잇따라 주상원 의원에 당선된 것을 포함해 상ㆍ하원을 합쳐 모두 4선 의원이 됐다. 1966년 오리건주로 ‘도미’한 임 의원은 그로서리 스토어와 부동산 회사 비타민 제조회사 등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인물. 1986년 오리건주 한인회장, 88년 미주총연 총연합회장, 89년 전국한인상공회의소장 등을 역임했다.

정치인으로 성공한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의원도 미주총연 출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신 의원은 테네시주 차타누가 한인회장과 미주총연 부회장을 지낸 바 있다.

김길영 미주총연 사무총장은 “미주총연이 70년대 이도형 회장에 의해 창립됐다면, 현재 총연의 기틀이 잡힌 것은 이민휘 회장때부터”라고 말한다.

이민휘 회장은 총연 회관 건립 터전을 구축하고, 순회 합동회의를 실시하는 등 내실을 다졌다. 또한 제5차 한민족대표자회의를 주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LA한인회장을 역임한 그는 2006년 ‘동포사회 발전후원재단’ 이사장을 맡는 등 최근까지도 활동의 폭을 넓히고 있다.

조직의 행정 틀을 구축한 인물로는 김길남 18대 회장을 둘 수 있다. 전 미주 한인 네트워크 구축사업을 진행하고, 발전기금을 만들어서 활동사항을 정리했다.

최병건 20대 회장은 미주총연의 직제를 구축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밖에도 재외국민 참정권 회복 운동 국회 청원서를 제출하고, 미주동포 권익옹호를 위한 헌법소원을 제출하기도 했다. 지난 1973년 미국으로 건너간 최 회장은 워싱턴 한인회장과 평통회장, 호남향우회장 등을 역임했다.

또 부인 최평란 전 워싱턴 한인YMCA 이사장과 함께 한미장학재단에 장학금을 기탁하는 등의 사회봉사 활동으로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기도 했다.

미주총연은 미국에서 사회봉사 단체로 인정받고 있다. 제19대 미주한인회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던 이오영씨는 이러한 활동으로 미국 이민자 옹호 단체인 소수민족연대협의회(NECO)가 주는 ‘엘리스 아일런드 상’을 받는다. 1973년 미국 필라델피아로 이민한 그는 이 지역에서 한인회장과 초대 민주평통 회장을 지낸 바 있다.

김영만 21대 회장은 미주총연의 위상을 강화하는 데 노력했다. 그는 ‘한국 바로 알리기’사업의 일환으로, 한국에 대한 오류를 찾아 시정하는 운동을 펼쳤다. 김승리 22대 회장은 재정 확보와 인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했다. 발전기금 100만달러를 선뜻 내 화제를 모은 그는 “일본 민단처럼 시스템을 구성하여 반드시 필요한 단체로 거듭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해 주목받았다.

김 회장은 1973년 노스웨스트 비즈니스 칼리지를 나와 시애틀과 LA 등에서 건축 금융 호텔업에 종사했으며 오리건 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