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포럼] “이승만 건국설은 사실 아닌 신화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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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포럼] “이승만 건국설은 사실 아닌 신화일 뿐”
  • 강성봉
  • 승인 2009.04.24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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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지난 17일 희망포럼 광화문홀에서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가 ‘이승만 김구와 해방정국의 현대사’라는 주제로 행한 제109회 희망포럼의 강연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주>

▲ 희망포럼 광화문홀에서 열린 ‘제109회 희망포럼’에서 서중석 성대 교수가 강연을 하고 있다.

해방직후 미군지배하의 남한에는 크게 지주와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한민당,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김규식 여운형이 이끄는 좌우합작파 등의 정치세력이 있었다. 여기에 이승만과 김구가 귀국, 가세하게 된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환국한 이후 한민당과 손을 잡는 한편 친일경찰, 친일관료, 친일경제인 등 친일파를 자신의 중요한 기반으로 포섭하였다.

미 국무부는 이승만의 극단적인 반공주의와 파당성이 한국문제를 풀어가는 데 도움을 주지 않을 것으로 판단해 그의 귀국을 달가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좌익을 억누르고 정국의 헤게모니를 잡는데 이승만이 필요하다고 본 맥아더사령부의 조치로 주한미군사령부의 환대를 받으며 귀국한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해 정국을 이끌어가려고 했으나 곧 실패했다.

김구는 1945년 11월 23일 임정요인들 중 제1진으로 귀국한 후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김구는 자신의 권력을 확대 강화하기 위하여 중경 임시정부 추대운동을 벌였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문제 처리를 위해 소집한 외상회의의 결의는 정국을 요동치게 만든다.

12월 28일 영국의 동의로 체결된 협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고, 일본 통치의 잔해를 빨리 청산할 조건들을 조성할 목적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둘째, 연합국이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원조·협력할 방안의 작성은 민주주의적 정당·사회단체들과의 협의를 통해 미소공동위원회가 수행한다. 셋째, 5년 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4대 강국에 의한 신탁통치의 협정은 한국 임시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4개국이 심의한 후 제출한다.

이 협정내용에 대해 한국독립당, 한국민주당 등의 우익세력은 신탁반대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반면에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등은 3상회의의 결의를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국제적 합의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좌우익의 대립에 미국·소련의 대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통일임시정부의 수립이라는 3상회의의 결정사항은 실현되지 못했다.

주한미군사령부는 모스크바삼상회의결정에 따라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게 되자 이승만을 민주의원의장직으로부터 물러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미국은 이승만을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걸림돌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소공위가 잘 풀리지 아니하자 이승만이 돌연히 급부상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미국이 소련과 협의해 통일정부를 수립할 경우 정부수반은 김규식이 적당하지만, 미소대립으로 단정을 수립할 경우 정부수반은 이승만이 적당하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1947년 초까지 미국은 통일 정부의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이 시기 미국정부와 주한미군사령부는 이승만이 (통일)임시정부 수립에 걸림돌이 되고 있어서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 사령관과 러치 군정장관은 단정이 수립된다는 낭설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하지는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을 지지, 지원했다.

최근 일각에서는 건국절 운운하면서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건국’이라는 말이 수천년간 독립국가를 발전시켜온 우리한테 합당하냐는 주장은 일단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이승만 건국설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는, 뉴라이트의 21세기 신화일 뿐이다.

5·10선거는 이승만 때문에 하게 된 것이 아니었고, 5·10선거 실시에 이승만은 관여할 수도 없었다. 그는 단지 후보자의 한 명이었을 뿐이다. 5·10선거에는 단정운동세력도 참여했지만, 조봉암 등 통일운동세력도 참여했다. 현실적으로 분단을 막을 수 없는 시점에 왔으면, 선거에 참여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민주주의와 민족 대의에 부합하는 바람직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단정운동세력을 유권자들이 얼마나 미워했는지는 5·10선거에서 잘 드러났다.

민중의 지지를 받는 김구·김규식 등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참여하지 않았고, 한민당·이승만세력은 미군정하에서 막강한 위세를 자랑해 5·10선거는 이들의 독무대가 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 198명의 당선자중 한민당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된 사람은 겨우 29명이었고, 이승만지지자가 많은 독립촉성국민회의 당선자도 55명에 불과했다.

제헌국회의원 중 60명 내외는 대체로 김구, 김규식과 성향이 비슷했다. 이들은 진취적인 헌법을 제정했고, 부통령이나 국무총리로 김구 조소앙을 밀어 수구적 외세의존적이고 극우파시즘적인 단정운동세력과 싸우면서 민주주의와 민족 대의에 부합하는 대한민국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이들이 이승만 등 단정운동세력과 맞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해 친일파 처단에 앞장서고 농민 위주의 농지개혁법을 제정한 것도 같은 취지에서였다.

1949년 6월 김구 암살사건, 국회프락치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이들은 제헌국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해 ‘소장파 전성시대’를 열었으며, 대한민국이 정부수립 시점에서부터 단정운동세력 의도대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