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코리아 폐스티발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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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코리아 폐스티발을 다녀와서
  • dongpo
  • 승인 2003.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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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영 초

한국 사람들에게 일본을 다녀왔다고 얘기하지 말란다. 오사카는 한국이라며······.카메라를 이고 이곳저곳을 찍어보니 과연 한국의 시장골목이더라.스쳐가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코끝에 여운을 남기는 좁은 골목길이며 금방이라도 열릴 듯한 느슨한 가게문,옆 골목 어딘가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자전거바퀴소리가 낮게 깔린다.사람 사는 곳 어디가 다르랴. 하기엔 어둠까지 닮았다. 아,저기 저 불빛은 무엇인가!
“아·리·랑·식·당”        
한순간 뭉클 하는 떨림이 스쳐갔다. 우리가 머물게 될 곳이 소박하기 그지없는 동포의 가게 인 것이다.고개 숙인 신랑각시 인형이 손님을 반기고, 없는게 없는 차림표까지 모든 것이 이곳에 다 모였네······.그렇지만 알 수 없는 적막감은 나를 수그러지게 했다.눈에 보이는 살림살이만으로는 움직이게 만드는 무엇인가 빠져있는 듯 하다.
살림살이는 계곡에 자리 잡은 바위같은 것이다. 물살에 의해 모이고 흩어지기를 하고, 이끼가 서리기도 하고, 돌다리가 되기도 한다. 바위는 수동적이다. 물살이 내리치지 않으면 바위는 멈춰 버리는 부차적인 것이다. 물길이 트이는 곳에 바위는 움직인다. 물길은 바위를 타면서 모양새를 다듬는다. 색깔을 입히고 빛깔을 새긴다. 그러면서 부딪친다. 그렇게 순환한다. 그 물길이 내 안에 흐르는 것일까? 지금 이 요동치는 느낌은,그 뭉클함은 무엇인가?
핏줄이구나! 그러나 핏줄기는 저 깊숙한 진흙 속까지 저 험한 바위틈까지 저 넓은 바다 속까지 왜 떠도는 것일까? 우리의 가슴 속 핏덩이는 어디까지 흘러가는가.우리의 핏줄이 여기 이곳에 눈앞에서 흘러가는데 왜 나는 붙잡지 못했을까.계곡의 물줄과 물줄이 만나 뒤섞여 소용돌이 치는 까닭은 무엇이며 우리의 핏줄과 핏줄이 마냥 그대로 흘러가는 까닭은 무엇인가! 어떤 모호함이 우리를 이렇게 서성이게 만드는 것일까.끝내 나는 핏줄기를 잡을 수 없었다.응어리진 핏덩이가 손이 되어 너를 잡고 하나 되고 또 하나 잡아 우리가 되고 우리가 한 덩이가 되어 돌리고 돌리고 돌리면서 소용돌이칠때 우리는 ‘원’이 되니 그 순수한 원초적인 행위자체에 어찌 승화된 응어리의 소용돌이가 없으랴······.  
귀먹은 늙은 사람, 팔팔한 젊은 사람,  아프지만 착한 사람,어둠속 숨죽이며 지켜보는 사람, 시장 골목에 쪼그린 상인들 모두의 응어리를 아우를수 있는 놀이판이 되야한다. 슬프게도 이번 ‘원 코리아 폐스티발’의 공연에선 소리없는 아우름 놀이판이 기계음 속에 묻혀버렸다.객석과 무대의 경계는 보이지 않는 이질감으로 가로 막혀 버렸다.진정한 동그라미의 정신으로 손이 맞잡히는 감격이 절실했다.수동적인 무대 위 마무리는 여러 장르의 음악이 뒤섞여 표면적 통합은 됐지만 하나됨을 갈망하는 민족의 응어리를 씻어 낼 수 있는 ‘ 아우름의 내적 정신 통합’은 원의 모호함 속에서 서성거렸다. 한 사람의 손내밈으로 그려낼 수 없는 동그라미이다.이제 민족의 응어리진 핏덩이를 풀어버리자. 단순하고도 승화된 몸짓으로 고요하고도 고동치는 마음으로 모두 다 흙을 디디면서 모두 다 똑같은 눈높이로 모두 다 마음과 마음이 고동치며 아우러지는 원을 돌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