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브레튼우즈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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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브레튼우즈 체제
  • 이종태
  • 승인 2008.08.2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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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태(금융경제연구소 연구원)
지난 6년 동안 지속된 달러 약세가 최근 들어 강세 기조로 급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벌써 ‘강한 달러 시대의 개막’을 점치고 있을 정도인데 이는 매우 놀라운 현상이다.

놀라운 현상인 이유는, 첫째 미국의 경상수지가 이미 지속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져 있기 때문이다. 2006년 현재 미국 경상수지 적자는 GDP의 6.5%인 8천억달러를 웃돌고 있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경상수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달러화 가치를 떨어뜨릴 필요가 있었다.

두 번째는 서브프라임 사태로 미국 경제(와 달러화)에 대한 전망이 시장에서 매우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지난달까지만 해도 달러화 가치의 대폭 절하는 시간문제로 간주되었고, 성급한 이들은 미국 헤게모니의 몰락에 대해 토론하기 바빴다.

그러나 달러화는 8월 둘째 주부터 갑자기 치솟더니 이후 강세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돌발 사태가 발생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미국의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는 지난 10여년 동안 세계경제질서의 중심축으로, 대다수 산업국가들의 이해가 걸린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즉, 미국뿐 아니라 대다수의 산업국가(한국을 포함한)들이 미국 경상수지 적자의 증가 및 비대화로 ‘재미를 봤고’, 따라서 이 시스템이 갑자기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다.

예컨대 동아시아는 값싼 소비재를 미국에 수출해서 미국인들의 과잉소비를 지탱해준다. 그대신 엄청난 규모의 무역흑자를 얻는다.

그리고 이 천문학적 규모의 무역흑자는 다시 미재무성채권(T-bond) 등 미국 금융상품에 투자돼 이 나라의 경상수지 적자를 보전하는데 사용된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이 미국에만 이익을 줬다고 말할 수는 없다.

미국이 경상수지 적자 기조에 따라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높은 투자율을 향유할 수 있었다면, 동아시아는 이 구도 덕분에 수출을 통한 경제성장과 대규모의 무역흑자를 챙길 수 있었다.

그래서 도이치은행의 이코노미스트들은 이런 동아시아-미국 관계를 ‘제2차 브레튼우즈 체제’라고 명명한 바 있다. 동아시아는 ‘무역흑자와 경제성장’을, 미국은 ‘과소비와 적자 보전’을 교환하는, ‘암묵적 계약’이 두 지역 간에 작동해왔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미국 경상수지 적자 규모를 줄이는 흐름(이엔 필연적으로 달러화 절하가 포함된다)은, 미국과 다른 나라들 간에 금융·상품 싸이클을 무너뜨리면서, ‘제2차 브레튼우즈 체제’의 파괴로 귀결될 것이었다.
 
예컨대 8월초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여겨졌던 달러가치 절하는 미국의 물가를 인상시켜 소비 규모를 크게 줄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는 소비 부문이 주도하는 미국경제의 장기 침체는 물론 수출시장을 상실한 동아시아의 불황과 구조조정을 촉발시킬 가능성이 컸다.

더욱이 미국의 입장에서는 이후 경상수지 균형을 맞추기 위해 수출을 촉진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 경우, 미국은 세계시장에서 비교우위를 지키고 있는 하이테크 부문(반도체, 컴퓨터, 의료기기 등)과 서비스 부문(금융, 비즈니스 서비스)을 수출산업으로 육성할 것이며, 평가절하된 달러는 미국의 수출 경쟁력을 한층 강화할 것이었다.

‘강력한 수출국가’ 미국은, 동아시아는 물론 유럽과 캐나다-멕시코 등의 나프타 국가들에게 공히 치명적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최근 미국 달러화의 평가절상은 사실상 ‘제2차 브레튼우즈 체제’의 연장을 예고하는 것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를 위한 ‘암묵적’ 국제협약이 형성되고 있는 중이라고 믿는다.

유럽중앙은행(ECB) 트리세 총재는 8월7일, “유럽경제의 성장세가 3분기에 특히 약화될 것”이라며 이 지역의 금리인상 가능성을 부인했는데, 이는 사실상 달러화의 평가절상을 측면 지원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강한 달러’는 미국경제에 대한 자연스러운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지속 가능성이 매우 의심스럽다. 지금 세계는 미국경제와의 ‘동반 몰락’을 피하기 위해 국제적 불균형을 지탱하기로 결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공포의 균형’이다.

만약 미국 정부가 서브프라임 사태를 연착륙시킬 수 있다면, ‘제2차 브레튼우즈 체제’는 지속적인 불황과 양극화를 동반하면서도 이럭저럭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서브프라임 사태를 연착륙시키는데 실패한다면, 세계는 지난 몇 년 동안 창출된 수백조 달러 규모의 과잉 유동성을 정리하는, 고강도의 지구적 구조조정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다.

또한 이 경우엔 서브프라임 사태 이전의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벤치마킹해왔던 한국의 미래 역시 매우 불확실한 국면에 접어들게 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