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놋쇠 요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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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놋쇠 요강
  • 윤조셉(국제통상전략연구원 원장)
  • 승인 2008.06.05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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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요강’이 무언지 모르는 세대가 많아졌지만 60∼70년대까지만 해도 시집갈 때 놋쇠 요강이 빠지면 ‘반쪽 혼수’라며 시댁에서 실쭉거릴 정도로 요긴한 혼수 품목이었다.

갓 결혼해 신행 길 오른 신부의 가마 속에 으레 자리잡고 있던 것도 바로 요강이었다. 친정 어머니가 눈물 훔치며 요강 속에 앉혀 둔 목화씨는 참으로 그윽한 모정의 징표였다. 가마를 탄 새댁이 밖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소리 내어 소변을 볼 수 없기에 친정 어머니가 준비해 놓은 지혜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요강은 산업화로 인한 거주 문화의 변화와 더불어 전혀 쓸모 없는 추억의 물건으로 남게 되고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을 우리는 아련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라지는 놋쇠 요강을 활용해 사업의 기반을 마련한 경우도 있다. 200달러로 시작해 캐나다 토론토 최고의 거부가 된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World OKTA) 전 회장이자 영리무역 회장인 이영현이 그 주인공이다.

1973년 처음 무역을 할 당시, 그는 돈이 될만한 것은 닥치는 대로 수입해 캐나다에 팔았다고 한다. 한국상품을 수입하는 무역회사를 차린 이 회장은 수입서부터 판매까지 혼자 도맡아 했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한국에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된 놋쇠 요강을 잘 닦아 밑에 솜을 깐 뒤 상자로 예쁘게 포장해‘캔디 박스’로 판 것이다. 서구의 고급스런 놋쇠 장식품이 된 것이다.

그의 탁월한 상술과 노력의 결과, 놋쇠 요강으로 시작한 그의 무역업은 지금까지 1조원을 넘게 수출 실적을 올릴 정도로 신화가 되었다. 그는 현재 캐나다에 7개의 빌딩을 가진 부호가 됐고, ‘캐나다 한국 이민의 신화’로 불린다.

70년대만 해도 팔 만한 한국 제품이 거의 없었다. 지금이야 디지털 카메라나 셋톱박스 등 종류가 많지만 당시 외국에서 인기 있었던 품목은 가발, 가방 정도였다. 그는 너무나 한국 제품을 팔고 싶어서 빨래판, 요강, 대나무 제품 등 가리지 않고 한국 물건을 캐나다로 가져가 상품화시키는 마술을 부렸다.

이영현 회장은 한국상품 수출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정부에서 주는 대통령 표창, 대한민국 산업훈장을 받았다.

유대인은 머리로, 중국인은 발로, 인도인은 입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한민족은 무엇으로 승부해야 하는가? 이영현 회장은 "한민족은 온몸으로 뛰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공한 이민자의 대부분은 덜 배우고 덜 똑똑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성공 노하우는 노력과 정직 그리고 창의적인 네트워크이다.

놋쇠 요강은 한국 무역이 가져야 할 글로벌 무역 정책의 방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신제품의 연구개발(Research and Development)을 통한 경쟁적 아이템을 만드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연구개발에는 수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

이러한 연구개발과 병행하여, 적절한 상품을 필요로 하는 곳에 알맞게 분배하는 연계개발(Connect and Development)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놋쇠 요강이 보여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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