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한 뼘 햇볕이 내 집에 머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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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한 뼘 햇볕이 내 집에 머물게
  • 김 사비나
  • 승인 2008.06.05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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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만 한 햇볕 한 조각만 있어도 행복할 수 있는 우리다. 그 손바닥만 한 햇볕 한 조각에 소망과 사랑을 담을 수 있는 우리다. 손바닥만 한 여유만 있어도 우리는 주위를 돌아 볼 수 있는다.

지난주 연휴라서 교회에서 가족 수양회를 가진다고 하였다. 연휴 동안 집에서 텔레비전과 씨름 하는 것 보다 나을 것 같아 따라 갔다. 교회를 옮긴지 얼마 안 되어, 더불어 끼어지지 않은 모래알 같지만 따라 나섰다. 모두들 교회 버스를 타고 갔다. 2박 3일 일정의 수양회라 보따리 하나씩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 귀찮아 내 차를 몰고 나중에 간다고 가서 보니, 제일 먼저 도착 하였다. 소속감이 없으니 책임이 없고 챙겨야 할 일이 없으니 산천도 바라보고 축축한 바람 속에 향긋한 바닷바람소리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와서 보니, 몇 년 전에 아들 목사와 교인들과 와서 수양회를 가졌던 곳이었다. 전에는 아들이 목사이니 준비가 얼마나 많은지, 음식 준비 과제물 준비, 선물 준비, 게임 준비, 돌아 볼 산천도 없었다. 푸르메리아 꽃향기 들어 마실 만한 여유도 없었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축축한 바람에 실려 오는 바다 냄새도 못 맡았다.

그 후에도 올 2월 까지 섬기던 교회에서 앞도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뛰어 다니다 보니, 한 중앙에 서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이제는 내려 갈 길인데, 어떻게 예쁘게 아름답게 여운 있게 내려 갈 것인가 하다가 시기를 놓이고, 추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유증이 얼마나 컸는지, 도무지 어느 곳에도 소속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헛되고 헛된 것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여 자기 자신이 얼마나 황폐 하여 가는지 모르고 살아간다. 나 아니면 안 되는데 하고, 그 일을 힘들게 하여 가다 보면 어느 날 삐걱거리는 것을 본다. 이미 내려오는 시기를 놓쳐버린 때 일 것이다.

신문에서 보면 그런 분을 본다. 저사람 위태 한데 하다 보면 어느 날 대문짝만하게 얼굴이 실려 있다. 신문에 실린 얼굴은 좋은 일보다 안 좋은 일이 더 많은 것을 본다. 특별히 영향력을 가진 분이나 연예계 사람이나 이런 분들은 좋은 일이 더 많을지 모르지만, 얼마 전에 잘 알려진 분이 노인을 폭행했다고 신문에 곤혹스런 얼굴을 보았다. 자신이 올라 갈 때는 이웃에게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모른다. 우리가 뱉어버리는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을 알지 못한다. 고난을 당해야 그때야 뼈저리게 알게 되는 자신이다.

가족 수양회에는 젊은이들이 더 많았다. 젊은 목사님, 젊은 강도사님, 사역자들, 내가 그 젊음에 묻혀 있었다. 문뜩 13년 전에 아들이 목회를 할 적에 겨우 31살이라 시행착오를 많이 만들면서 청소년들과 수양회를 자주 갔고, 나는 아이들 시중을 들으려 따라 다니었다. 내 나이는 생각지 않고, 그들과 어울려서 밤샘하고, 그들과 동화를 꿈꾸던 생각이 났다. 사람만이 추억의 동물이라 지난 것은 다 그리움이고, 소중하게 간직하는 네 잎 크로버 같다.

이번 수양회를 통하여 나도 이제는 내 나이보다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자 하고 생각을 했다. 젊게 사는 비결 같았다. 전에 섬기던 교회는 평균 연령이 62세 이었기에, 일거리가 많았다. 전부 섬겨야 할 분들이고, 팽팽하고 싱싱한 아이디어 보다 과거에 했던 것을 다시 해보는 안전성을 유지하는 보수들에 젖어 있다가, 젊음 이들의 새 노래에 반했다. 그리고 온 교인 초등 일학년부터 노인에 이르기 까지 함께 하는 게임이 좋았다. 저녁예배가 끝이 나면 9시 반이다. 그 밤에 한 시간 운전하여 집으로 남편과 오는 길은 우리가 같이 살아온 48년을 삭이여 보는 시간이 되었다.

살아보면 싸울 일이 얼마나 많은가, 살아 보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살아 보면 배신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죽이고 싶어지고,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 번 나던 때가 있지 안했는가. 캄캄한 밤길에 별빛만 초롱초롱 하다. 그 길을 자동차 불빛에 의지하여 질주 하는 길. 우리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남편과 아내가 사랑의 빛으로만 어둠을 헤치고 달려오는 길이다. 그 길에 더러 두 갈래 길도 나온다. 밤이라서 옆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온 적도 있다.

살아오면서 시행착오로 상대방에 배신하여 다시 돌아오던 남편이 아니던가. 용서라는 말도 하기 싫은 때다.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으로 용서로 대신하고 무언으로 받아 주면 한 뼘만 한 틈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다시 제자리를 찾아 가던 우리의 삶이 아니던가.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11시다, 아침예배 시간 맞추어 올라갔다. 3일을 그렇게 하는 동안 차안에서 긴 데이트를 하였다. 혼자 중얼 거려도, 혼자의 말은 아니다. 그와 같이 살아오면서 많이 주고받은 말이다.

살아오면서 아끼던 말을 한번 툭 던져 보아도 전 같으면 화를 덜컥 내었을 것 같은데, 그냥 넘어 가며 피식 웃어넘긴다. 그만큼 이제 서로를 알아 버린 것이다. 너무 알아 버린 우리, 그가 "우" 하면, 나는 "좌"하는 음률을 맞출 줄 알고 있다. 이것이 농익은 삶이 아닌가. 가족 수양회는 한데 더불어 살아가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주제가 사랑이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것. 사랑의 정의. 사랑하는 방법, 5회에 걸쳐 나누었다. 마지막 날 저녁에는 실천으로 서로의 발을 씻어 주는 과정을 거쳤다. 목사님이 전교인의 왼쪽 발을 씻어 주고, 오른 쪽 발은 옆에 사람이 씻어 주는 것으로 사랑의 완성을 이루었다.

그 밤에 돌아오면서 내 남은 생을 발을 씻어 주는 것으로 살아 보자 해 보았다. 내 후년이면 결혼 50회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 갈 날이 짧은 인생에 서로의 발을 씻어 주며 살아간다면, 한 뼘의 햇볕이 내 집에 항상 머물게 하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