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모습 마음속에서만 남아있는 고향, 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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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모습 마음속에서만 남아있는 고향, 천안...
  • 김주언
  • 승인 2008.04.10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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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살던 고향은- 충남 천안시 직산
▲ 천안의 북단에 위치한 직산읍도 최근 도시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고향이란 말만 들어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고국을 떠난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오랫동안 감회에 젖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고향이란 말은 이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일상에 바빠서 자주 찾지 못하는 사람도 많고, 고향은 있어도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어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후자에 속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충남 천안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 이제 천안은 서울에서 KTX를 타고 30분정도면 다다를 수 있는 ‘수도권’ 교통 요충지로 변모했다. 그러나 불과 30여년 전만 해도 완행열차로 천안까지 내려간 다음, 30분 이상 기다려 완행버스를 타고 30분쯤 가다가 언덕 골목에서 내려 20분 이상 걸어 들어가야 했다.

이제는 승용차만 있으면 서울 집에서 2시간이면 충분히 들어설 수 있지만, 중학시절까지만 해도 서울 구경 한번 하지 못할 만큼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 이제는 고향집에 들어서는 좁다란 골목길도 확장돼 포장됐지만, 당시에는 비만 오면 장화를 신고 다녀야 할 정도로 후미진 동네였다.

고향이 이렇게 가까운데도 자주 찾지 않고 고향에 대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옛날의 정취를 느낄 만한 공간이 거의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천안시 전역이 아파트 숲으로 변모했을 뿐더러 공장이 들어서 산골이라는 느낌이 없어졌다.

그래서 천안은 ‘수도권’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고향 집 뒷산엔 넓은 도로가 뚫리고 있고 주변엔 수백가구가 들어서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다. 어린 시절 뛰놀던 동산과 개천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고 있다. 마을 어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느티나무만이 고향마을이라는 증거로 남아 있을 뿐이다.

당시엔 조그마한 농촌마을이었지만 그래도 주민 간의 화해는 남달랐다. 마을 앞에 있던 공동우물 가는 아낙네들의 수다로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좁은 골목길은 꼬마들의 술래잡기 놀이터였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개천과 방죽(저수지)는 여름철 꼬마들이 멱 감는 소중한 목욕탕(?)이자 낚시터이기도 했다.

마을 어귀 밭에서 참외와 수박이 익어가는 여름철엔 동네 아이들의 참외 서리와 수박 서리로 몸살을 앓았지만, 주인에게 들키더라도 ‘참외순과 수박순을 밟지 말라’는 훈계를 듣고 풀려날 수 있었다.

당시 조그마한 농촌마을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칸델라 불빛으로 밤을 밝히며 책을 읽었다. 걸어서 30여분 거리인 읍내만 해도 전기가 들어왔지만, 고향마을엔 흔한 전봇대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집에선 등잔불이 전등을 대신했지만, 유독 우리 집에서는 카바이드에 불을 부어 발생하는 아세틸렌 가스에 불을 붙여 전등을 대신했다.

다른 집의 전등에 비해 환하게 밝히는 칸델라 불빛이 자랑스러웠던 기억으로 남는다. 그래서 TV는 꿈에도 꾸지 못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가락과 드라마가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국가대항 축구경기가 있으면 동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아나운서의 흥분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한국팀(아나운서는 ‘한국군’이라고 불렀다)이 한 골이라도 넣으면 모두들 손을 흔들며 환호를 지르곤 했다.

10여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조그마한 농촌마을이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주민의 화해는 남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을철 추수를 끝낸 뒤 고사를 지내고 남은 시루떡은 집집마다 나눠 먹었으며, 황구라도 한 마리 잡는 날이면 동네 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여름철 농사철에는 품앗이로 이웃 일을 거들었다. 겨울날 저녁에는 마을 주민이 뜨끈뜨끈하게 데워놓은 아랫목에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설날에는 집집마다 어른들을 찾아 뵙고 세배를 드리는 일이 자연스런 풍경이었다.

나는 국민학교(현재는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4학년때까지만 해도 천안시내에 있는 천안국민학교에 다녔다. 아버지가 고향집으로 귀농하면서 직산국민학교로 전학을 와야 했다. 고향집은 읍내에서도 걸어서 20분쯤 걸리는 산골마을이었다. 국민학교를 마친 뒤에는 다시 천안시내에 있는 천안중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중학교 3년 동안 집에서 천안까지 통학을 해야 했다. 어머니가 해주시는 새벽밥을 먹고 40여분 동안 직산역까지 걸어간 뒤 기차를 타고 천안역에서 내려 다시 학교까지 걸어가면 녹초가 되기 마련이다.

당시 기차 통학생들에 대해 선생님들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내외에서 말썽을 일으켰던 학생 중에는 유독 기차 통학생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들의 편견(?) 때문에 교문 앞에서 벌을 선 적도 한두번이 아니고 선배들에게 몽둥이 세례를 받기도 했다. 기차 시간에 맞추기 위해 헐레벌떡 역 구내로 뛰어 들었다가, 기차를 놓치고 학교에 지각해 벌을 서던 기억도 선명하다.

기차 통학시절은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특히 명절때만 되면 기차 문 난간을 잡고 가까스로 열차에 몸을 실은 귀향객으로 가득 찬 기차가 역 어귀로 들어서는 장관은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당시 정부에서는 이중과세를 금지한다는 명목으로 설날에도 학교를 열었기 때문에 기차 통학생들은 귀성객 틈에 억지로 끼어 들어 통학을 해야 했다.

명절 귀성객들이 몰고 가는 승용차들로 가득 찬 고속도로 풍경을 TV로 보면서 당시의 장엄한(?) 광경을 떠올리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서울로 유학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도 부러워 하는 일류고인 서울고등학교에 당당히 합격한 것이다. 이때부터 시골 촌놈의 고단한 서울살이가 시작됐다. 자취, 입주 아르바이트, 친척집이나 친구 집에 얹혀 살기 등으로 눈치를 보아가며 어렵게 살 때마다 생각나는 건 고향마을의 안온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방학때 고향에 돌아와 어린 시절을 꿈꾸며 쉬려 해도 이제는 옛날 정취가 살아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며 새로운 세상을 겪어본 탓도 있지만, 이제 고향 마을도 옛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변모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향 마을은 논과 밭은 어느새 천안이나 서울 사람 차지가 되어 버렸고, 마을 주변에는 공장과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내가 살던 집은 허물어진 채 그 위로 도로가 뚫리고, 나무로 가득 찼던 뒷동산은 시뻘건 흙만 뒤덮인 민둥산으로 바뀌었다. 마을 주민들은 하나 둘 읍내나 대처로 떠나 그들이 살던 집은 흉가가 되어버려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시(市) 나무로 지정돼 오랜 세월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뿐이다. 느티나무는 고향 마을의 터줏대감으로 변화무쌍한 마을의 변천사와 사람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우리들의 옛날과 현재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