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든 화려하게 부활하는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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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든 화려하게 부활하는 '고려인'
  • 이현아 기자
  • 승인 2008.03.06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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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애환 다룬 음악극‘뜨란지뜨 1937’

“우리 고려인들 피붙이는 어딜 가도 죽지 않으니 걱정 붙들어 매세요”

중앙아시아로 떠나라는 청천벽력 같은 명령에, 고려인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척박하고, 메마른 땅으로 쫓겨 가도 결국은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끝내 살아내고야 마는 고려들을 두고 “이들은 어느 땅에 데려다 놔도 화려하게 부활하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하는 젊은 연극인들을 만나 보았다.

지난 2일 중앙대학교 안성 캠퍼스에서는 국악대학 음악극과 학생들의 연극 ‘뜨란지뜨 1937’ 막바지 연습이 한창이었다. 유태인의 이야기인 ‘지붕 위의 바이올린’을 각색한 ‘뜨란지뜨 1937’은 고향을 잃고 사할린 지역을 철새처럼 옮겨 다니는 고려인 가정을 중심으로 당시 고려인 사회의 일상을 조명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삶에 깊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회와 역사의 부조리를 드러낸 음악극이다.

아버지 역할에 더블 캐스팅 된 추종훈 군은 “한국 사람들이 다른 지역에서 다른 민족의 틈새에 끼여 살고 있다는 데에 놀랐지만 이제는 그 지역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는 가장 인상 깊은 장면으로 러시아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막내딸을 두고 “이것만큼은 그러지 말아야 했어”라며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독백을 꼽으며 “외국사람 만나는 일이 지금은 자연스러워도 최초에는 매우 큰 사건이었을 텐데 전통을 고수하려는 끊임없는 몸부림이 얼마나 강렬했었나 느꼈다”고 설명했다.

연극은 가난한 조선인 가장이 딸들을 시집보내는 간단한 줄거리로 진행되지만 타의에 의한 이주민의 삶 속에서 새로운 문화와 전통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고려인의 일생을 통해 역사적인 비극을 드러내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연출을 맡은 정호붕 교수는 이번 공연의 의도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를 관심 있게 지켜보자는 것이었다”고 설명하면서도, “러시아에서 한 고려인 아주머니가 한국에 도착해 공항에 내리자마자 눈물을 쏟아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저 여행이나 한다는 마음으로 떠나온 그 아주머니가 막상 공항에 내리니 주최할 수 없이 눈물이 났다는 얘기에서 그 보이지 않는 고향, 조국에 대한 마음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됐다”고 러시아 유학시절 만난 고려인들의 특별한 인상이 큰 영향을 미쳤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지금은 문화와 언어의 차이가 너무 커 낯설게 느껴진다고 해도, 분명 보이지 않는 끈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배우나 관객 모두에게 낯선 존재인 고려인을 무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 힘이 된 것이다.

정 교수는 “이전에 고려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던 우리 학생들이 고려인을 연기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애환을 이해하는 과정을 겪으며 연기자로서도 한층 성장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고 배우들에 대한 기대를 덧붙였다.

그는 “내가 만났던 고려인들이 대체로 드러내는 억센 부분, 잡초 같은 부분들이 있었는데, 이런 부분이 늘 투쟁하면서 살아왔던 그들에게는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됐다”며 “해외에 이주해 살고 있는 이들의 근본적인 불안감을 드러내는 것이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다”라고 말했다.

시종일관 활기차고 유쾌하게 진행되는 공연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전통 가락이 중심을 잡고, 고려인의 희비극이 교차되면서 젊은 연극인들의 패기가 넘쳐흘렀다. 특히, 아무리 괴롭고 힘든 일이 일어나도 다시금 주먹을 불끈 쥐면서 “우리가 넘어온 고비가 얼만데!”라고 외치며 훌훌 털어버린 후 새로운 고개를 넘는 고려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번 공연은 교육부의 교육문화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내달 4일 중앙대학교 흑석동 캠퍼스 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린 후 3일간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