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과 멋이 있어, 나의 마음이 오래 머무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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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과 멋이 있어, 나의 마음이 오래 머무는 그곳
  • 윤희상 (시인)
  • 승인 2008.02.28 15:3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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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살던 고향은 - 전라도 나주
전라도 나주는 나의 고향이다. 조상들이 나주시 오량동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한 것은 연산군 시절 갑자사화 때의 일로 500년이 더 된다.

나주는 오래된 고을이다. 반남 고분과 복암리 고분이 이를 말해 준다. 영산강을 따라 형성된 마을에서 고인돌과 옹관묘도 볼 수 있다. 전라도라는 이름도 전주와 나주에서 따온 이름이다. 나주 남평 땅을 지나는 길 옆에 '천년 목사 고을 나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나주는 983년 고려 성종 때 전국 12목 가운데 하나인 나주목이 된 이래 1896년 전라남도 관찰부가 광주로 옮길 때까지 전남의 가장 큰 고을이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영산강문화축제'가 열린다. 이때 문화 체험에 흠뻑 젖을 수 있다. 나주 향교와 나주 관아를 비롯해 인기 드라마 <주몽>의 촬영지인 공산의 삼한지 테마파크도 둘러 볼 수 있다. 나주 나씨, 나주 정씨, 나주 임씨, 남평 문씨, 반남 박씨, 나주 오씨처럼, 나주는 많은 성씨의 고향이다.이를 알리는 전국에 하나밖에 없는 공원도 있다. 성향공원이다.

정열사는 임진왜란 때의 김천일 의병장을 추모하는 곳이다. 나의 12대조 윤의 할아버지도 나주에서 의병을 모아 임진왜란의 여러 전투에 출전했다. 결국 김천일 의병장과 함께 제2차 진주성 싸움에 나섰다가 성이 함락되면서 1593년에 순절했다. 윤의 할아버지의 부인인 수성 최씨 할머니도 남편의 순절 소식을 듣고, 영산강에 몸을 던져 숨졌다. 가야동 선산에 두 분을 모셨지만, 윤의 할아버지의 시신은 미처 거두지 못했다.

600년 전에 건립된 나주향교는 규모가 크고, 대성전 마당에는 오래된 큰 은행나무가 있다. 특히 우리 건축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반드시 다녀가는 곳이다. 향교에서 가까운 곳에 나주 관아 건물들이 있다. 금성관과 그 주변을 산책삼아 구경하다 보면, 옛 고을의 정겨움과 함께 잠시나마 과거로의 여행을 꿈꿀 수 있다. 이곳의 앞거리에 나주 곰탕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들이 있다. 나주까지 갔다가 나주 곰탕을 먹지 않고 온다면, 후회할 일이다. 맑은 국물과 부드러운 한우고기의 속살은 맛을 깊고, 시원하게 한다.

구진포 장어구이가 맛있는 것은 독특한 요리법 때문이다. 양념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비법'이다. 아마 온갖 좋다는 것은 다 넣지 않나 싶다. 어려서 장어구이집 마루에 앉아서 봤다. 양념을 바르고, 굽고, 다시 양념을 바르고, 굽기를 계속했다. 그러면 담백하고 고소한 맛의 장어구이가 완성된다. 지금도 맛은 옛맛 그대로다.

본래 영산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포구다. 내륙 깊숙한 곳이 포구라면 믿지 못할 사람이 많겠지만, 하류의 하구언 둑이 있기 전까지 많은 배가 드나들던 포구였다. 현재도 오래된 등대가 강변의 선창에 남아 옛 시절을 더듬게 한다. 뱃길이 끊긴 지 30여 년이 지났다. 영산포는 영암, 장흥, 강진, 해남, 완도, 진도로 드나드는 길목이다.

그래서 영산포역은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영산포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졌으며, 고향을 떠났다. 지금은 영산포역도 없어졌다. 나주역과 영산포역 사이에 나주역이 새로 세워지면서 2001년 7월 10일 문을 닫았다.

영산포 장은 큰 장이었다. 사람이 모이고, 농산물이 모였다. 선창은 선창대로, 우시장은 우시장대로 사람이 넘쳤다. 여러 지방의 농산물이 영산포역 화물 야적장과 창고에 가득 쌓였다. 내가 어릴 때, 어른들이 서울의 쌀값을 영산포에서 조절한다고 했다. 배가 오지 않아도 영산포 선창은 지금 바쁘다. 홍어는 흑산도에서 잡았지만, 그 홍어를 숙성시키고 유통시킨 곳은 영산포였다. 배들이 홍어를 싣고 흑산도에서 영산포까지 왔다.

홍어 맛을 결정하는 것은 숙성인데, 영산포에서 숙성한 홍어가 현재도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공급되고 있다. 고향집에서 요소 비료 겉포장지 종이로 홍어를 잘 싸서 두엄 속에 넣어 두거나, 옹기 항아리 속에 볏짚으로 홍어를 싸서 넣어 두면, 잘 숙성된 홍어가 되었다. 암모니아 냄새가 풍기면서 톡 쏘는 맛이 홍어의 참맛이다.

겨울에는 홍어 내장 애와 논에서 갓자란 보리 새싹을 넣고 국을 끓이면 홍어애탕이 되는데, 그 맛이 으뜸이다. 현재 영산포 선창에는 홍어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어 갈수록 찾는 사람들이 많다.

어려서 봉황 사촌누님 댁에 놀러갔다가 과수원에서 나주 배를 땄다. 그런데 한 그루의 배나무에서 어찌나 많이 열리던지 따도, 따도 그대로였던 기억이 난다. 나주 배는 단맛에 물이 많아 소비자들로부터 인기가 높고, 수출도 많이 했다. 금천에는 나주배박물관이 있다.

나는 안창동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이 조선시대 제민창터다. 제민창은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곡식을 보관하고 관리하던 곳이다. 마을 이름도 '제창 부락'이다. 마을 앞의 영산강에는 제민창을 오고 가던 배들이 닻을 내렸을 선창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을 뒤로는 산이 있고, 앞에는 들이 있다. 들 끝에서는 영산강이 흐른다.

강 건너에는 전설이 깃든 앙암바위와 개산이라고도 부르는 가야산이 있다. 가야산 뒤가 옹관묘와 고인돌이 많은 가야동이고, 그곳에 나의 큰집과 선산이 있다. 마을 한 가운데 있는 고향집에서 영산포를 지난 강물이 마을 오른쪽 끝의 구진포를 지나고, 회진나루를 지나 멀리 흘러가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강물은 더 내려가서 몽탄를 지나 목포 앞바다에 이른다. 해가 들과 강물 위에 붉은 빛을 뿌리며 노을지는 모습은 아름답기만 하다.

이런 모습도 여름 홍수철이 되면, 표정이 달라졌다. 강의 상류지역에 많은 비가 내리면, 어김없이 영산강이 범람했다. 사람들의 가슴은 무너졌다. 벼가 필 무렵, 하루만 강물에 잠기면 그해 농사는 헛농사가 되었다. 강이 범람하고 나면 둠벙이라고 부르는 연못에 물고기가 많았다. 이제 강의 상류에 장성댐, 담양댐, 광주댐, 나주댐이 생기면서 다소나마 사람의 지혜로 강을 다스리게 되었다.

마을의 별봉산 아래에 조선시대의 큰 학자인 미수 허목을 기리기 위해 세운 미천서원이 있다. 허목은 시인과 학자로 유명한 백호 임제의 외손자이다. 임제는 이웃 마을인 회진에서 살았다. 회진은 나주 임씨들이 사는 마을이다. 미천서원에는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이 있는데, 볕이 좋은 날은 꺼내서 말렸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도둑이 허목의 영정을 훔쳐갔다. 미천서원 안에 ‘미천’이라는 우물이 있다.

허목이 어렸을 때 외가인 회진에 내려와 있다가 이곳 마을 사람들이 가뭄으로 힘들어 하자 “내가 일러주는 곳을 파보면 물이 나올 것”이라고 하여 그곳을 팠더니, 높은 곳인데도 물이 솟았다고 한다. ‘미천‘의 물은 맛과 색이 마을의 다른 샘물과 다르다.

마을의 용진단은 당산할아버지를 모신 곳. 음력 1월에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서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 마을의 네 곳에 큰 당산나무가 있는데, 풍물패를 앞세우고 당산나무를 돌면서 제사는 늦은 밤까지 계속된다.

제사는 하루지만, 제사 기간이 있어서 당산나무 주변에 황토흙을 뿌리고 금줄을 쳐서 사람의 접근을 막았다. 이 기간에는 마을 사람들이 지켜야 할 금기 사항도 있다. 마을에서의 출산도 금지됐다. 제사 기간에 출산이 예정된 산모는 마을 밖으로 나갔다.

제사를 마치면, 마을 사람들이 음식을 나눠 먹었다. 제사라기보다는 큰 축제였던 셈이다. 당산제가 끝나고 정월 보름 무렵 때는 풍물패들이 집집마다 돌면서 며칠이고 신명나게 놀았다. 마당 한 가운데 불을 피워 놓은 채 밤이 새도록 이어졌다. 가끔 마을의 상여소리가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애잔한 것이 지금도 들릴 듯 싶다. 어려서 듣던 그 소리가 내 안에 아직 여운으로 남아서 진동한다.

▲ 윤희상(시인)
이제 나주는 새로운 발돋움을 하고 있다. 2012년까지 산포와 금천에 인구 5만 명의 광주전남혁신도시가 들어선다. 사업이 이미 시작됐다. 떠났던 고향 사람들도 다시 돌아오게 될 듯 싶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 고향을 떠났다. 1974년 8월 20일, 혼자 광주에 있는 학교로 전학했다. 그동안 고향을 추억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젊은 사람이 퇴행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느덧 고향은 나의 안에 깊이 머물고 있다. 전라도 나주는 나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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