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송외교와 평양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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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송외교와 평양의 선택
  • 정길화(문화방송PD)
  • 승인 2008.02.2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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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길화(문화방송 PD)
2008년 2월 26일 평양 한복판에 미국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Star-Spangled Banner)의 선율이 울려 퍼졌다. 로린 마젤이 지휘하는 뉴욕필하모닉의 평양 공연에서다.

MBC 중계진의 연출로 잡힌 화면이 한국은 물론 CNN 등을 통하여 전 세계에 송출되었다. 국가 연주 도중 화면은 무대 정면에서 보아 왼쪽에 게양된 성조기에서 정확하게 줌아웃(zoom out)했다. 객석의 청중 리액션 커트도 자주 나왔다. 기립해서 경의를 표하는 북한 사람들의 진지한 모습이 보였다.

물론 북한에서 미국 국가가 연주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고 한다. 지난 2005년 6월28일, 세계여자권투협의회(WBCF) 챔피언 타이틀전이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렸을 당시 1만2천여 명의 관중들 앞에서 이미 미국 국가가 연주됐다고 한다.

이 때 북한 여자 프로복싱 김광옥 선수와 미국의 이븐 카플스 선수가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 경기를 펼쳤고, 오프닝 세리모니에서 미국 국가가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울려 퍼진 것이다. 따라서 이번 미국 국가 연주는 3년 만의 일이다.

이날 미국 국가가 연주되기 직전에는 북한의 애국가가 연주되었다. 이 실황 역시 MBC 채널을 통해 전국에 방송되었다. 월북시인 박세영이 작사하고 북한 최고 작곡가인 김원균이 작곡했다는 북한의 ‘애국가’가 동시 생중계된 것이다.

역시 무대 오른쪽의 북한 국기 ‘인공기’에서 줌 아웃하는 장면이 나왔다. 북한의 애국가가 한국에서 공개리에 연주된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5년 8월 전주에서 열린 동아시아 축구대회의 남북대결에서 양측은 태극기와 인공기를 게양하고 각각의 ‘애국가’를 연주했다고 한다.

언론이 따지는 최초 여부를 떠나서 2월 26일 평양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뉴욕필하모닉 공연은 북미관계와 남북관계에 있어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소망하고 싶다. 한국전쟁 이후 평양에 제일 많은 미국인들이 왔다는 보도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세계 언론은 앞다투어 북미간의 오케스트라 외교를 보도하고 있다. 미국, 중국 간의 냉전을 녹인 ‘핑퐁외교’에 빗대어 ‘싱송(Sing Song)외교’라고 하는가 하면 바이올린 소리를 본 따 ‘핑핑외교’라고 칭하는 언론도 나왔다. ‘무기 대신 악기’를 들고 간 뉴욕필하모닉은 이데올로기를 녹이는 음악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음악은 정녕 북미간의 신세계를 이끌어줄 것인가.

그러나 과도한 의미 부여에 대해 조심스런 반응을 보이는 입장도 있다. 북핵 문제가 실질적인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고, 김정일 위원장이 참석하지 않아 미국의 당국자들은 이번 평양 공연은 하나의 공연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측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봄이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봄은 그 제비 한 마리의 몸짓에서부터 시작된다. 교류와 접촉은 상호간의 이해와 우호 증진의 가장 확실한 방법 중의 하나다. 그 기초는 상대 존재의 인정에서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3월 26일로 박두한 남북한의 월드컵 예선 평양 경기가 어떻게 될지는 귀추가 주목된다. 북측은 스포츠 관례인 태극기나 애국가의 평양 연주를 불허하겠다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신에 한반도기와 아리랑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붉은 악마 응원단의 대거입국에도 난색을 표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는 FIFA 규정에도 어긋나고 상호주의에도 벗어난다. 앞서 말하였듯 동아시아축구대회에서 우리 측은 이미 인공기와 북의 ‘애국가’를 실연한 바 있다. 그래서 “성조기는 되도 태극기는 안 되는 것이냐”는 지적이 비등하고 있다.

2월 26일과 3월 26일 공교롭게 한 달 간격으로 이루어지는 평양의 선택. 태극기, 애국가와 붉은 악마가 가져다줄 북한 사회의 충격파를 우려하는 입장을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나 이번 경우 어쩐지 자연스럽지 못하다. 2월 26일 동평양극장의 성조기, 미국 국가 이벤트가 없었다면 몰라도 말이다. 3월 26일에는 세계무대에 북의 진정성을 보여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