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최대 명절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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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최대 명절 '설'
  • 이현아 기자
  • 승인 2008.01.3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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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만 재외동포를 위한

고려시대에 설날을 9대 명절 중 하나로 삼았다가 조선시대에는 이를 다시 한식, 단오, 추석 등과 함께 4대 명절이라 일컫었다고 한다. 이런‘설’은 한민족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조상들은 묵은 1년이 지나가고 새로운 1년이 시작되는 날로써 신년운수가 달려 있다고 믿었던 음력 정월 초하룻날을 '삼가고 조심한다'는 뜻의‘설’이라 부르며 다양한 놀이와 풍습으로 한 해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했다.

한때는 양력과 음력 설을 모두 쇠는 것이 국가적인 낭비라는 의견이 제기돼 이중과세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조상 대대로 명절로 삼아 지낸 날이 음력‘설’인 점을 인정하게 됐고, 700만 재외동포를 비롯한 7천500만 한민족이 그 전통과 풍속을 즐겨 기리고 있다.

한민족에게 설이란 무엇일까

‘설’이란 명칭에 대해서는‘섧다’, ‘사린다’ 외에도 나이를 뜻하는‘살’등이 유래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육당 최남선 선생은‘조선상식문답’에서 '새해를 시작하는 첫날인 만큼 이 날을 아무 탈 없이 지내야 1년 365일이 평판하다'고 말하고 있어, ‘설’이 농경에 근간을 둔 한민족의 민간신앙에서 비롯했으리라고 짐작되고 있다. 한 해 농사의 시작인 봄을 앞두고 몸가짐을 정갈하게 하며, 가족 간의 화목을 도모하는 한편, 일 년 운세를 점치는 중요한 날이었던 것.

설을 앞둔 한해의 마지막 무렵을 ‘세밑’이나‘세모’라 일컬었으며 일반적으로 지난해의 마지막 날인 그믐날에는‘궤세’라고 하는 명절 선물을 준비해 친지에게 전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희망찬 마음으로 새해를 맞았다.

섣달 그믐날 자정이 지나면 골목마다 "복조리 사시오"라고 목청을 돋우는 장사치들에게 각 가정에서는 복조리를 산다. 일찍 살수록 좋으며 복을 불러야 한다는 뜻에서 복조리장수를 집으로 불러 복조리를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집안에 걸어두면 국자 모양의 옴폭 패인 곳으로 그득그득 복이 든다고 믿어 실제로 동전이나 엿을 넣어두기도 했는데, 이는 다산을 기원하는 농경사회의 염원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민속학자들은 풀이한다.

이렇듯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그믐날 밤이 분주하다 보니 이 밤에 잠이 드는 일은 멀리하기도 했다. 중국 등 한자 문화권에서는 그믐날밤 잠이 들면‘눈썹이 희게 센다’고 믿는다. 이와 함께 설날 이른 아침에 짐승의 소리를 듣고 새해의 운수를 점치는‘청참’에 까치소리를 들으면 길하고, 까마귀소리는 대흉으로 여겼다.

설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미리 마련해둔 새 옷‘설빔’을 입고 가족 및 친척들이 모여들어 정초의 차례를 지낸다. 명절에 올리는 제사인‘차례’는 기제사를 지내는 조상들에 올리는 약식제사로서 대청마루나 큰 방에서 지내며, 제상에는 병풍을 두른다.

덕담은 어른이 먼저...온 겨레가 민속놀이 즐겨

차례가 끝난 후 가족과 손님이 모여 먹는 설날 첫 식사를 ‘세찬’이라 하며, 어른들이 반주로 마시는 술을 ‘세주’라고 했다. 손님 대접에도 쓰고 제사에도 쓰는 떡국의 재료 가래떡은 흰색으로 ‘엄숙’과 ‘청결’을, 기다랗게 이어지는 모양으로 ‘장수’를 상징했다. 차려진 떡국과 탕, 과일, 술, 포, 식혜 등은 차례가 끝난 후 나누어 먹는데 조상이 드신 음식을 먹음으로써 덕을 물려받는다는 의미가 있었다.

차례가 끝나면 조상과 집안 어른께 성묘와, 세배를 한 후, 세장을 차려 입고 이웃 및 친인척을 찾아 새해인사를 하고 덕담을 들었다. 이때 집밖을 나서면 만나는 사람들마다 “과세 안녕하셨습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등 덕담을 주고받는데, 웃어른이 먼저 덕담을 하기 전에 아랫사람이 먼저 덕담을 건네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니 유의할 것.

가족과 친지에 예의를 차리는 행사가 끝나면 각종 민속놀이를 즐기며 한민족의 신명을 풀었다. 설 민속놀이의 원형은 청소년 집단에 의해서 관행되던 사람의 모습이나 동물로 가장한 대상을 흉내 내며 내쫓는 시늉을 한 것으로‘탈놀이’가 변형된 것으로 생각된다. 선조들은 이렇듯 액을 몰아내는 행위를 놀이로 승화해 일가친척 및 같은 부락의 사람들, 나아가서는 방방곡곡의 백성들이 함께 행했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 이러한 놀이는 가까운 이들이 함께 즐기는 의미를 강하게 띄게 되면서 널뛰기, 연날리기, 윷놀이, 팽이치기, 투전 등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이러한 놀이판에는 대표적 절식인 만두, 저냐, 편육, 약식, 인절미, 단자, 식혜, 수정과, 나박김치, 장김치, 깍두기 등이 세주와 함께 차려졌다.

이러한 놀이는 빈부, 신분, 남녀노소 등 모든 사회적 격차를 뛰어 넘어 한민족이 어우러지는 장으로 마련되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는 강력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사회에서도 널리 행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북한도 '금지' 풀어...한민족 고유명절로 우뚝

이렇듯 사회적 관습과 계급을 떠나 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명절로 자리 잡은 설날은 현대사회로 넘어오면서 멀리 흩어진 가족들을 한 자리로 불러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핵가족화의 심화와 편의와 이기를 추구하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점차 한민족 고유의 전통이 퇴색되는 경향도 보이고 있다.

북한에서는‘설’ 등 명절을 쇠는 것이‘봉건주의의 잔해’라며 금지해오다 1989년에 접어들며 부활시켜 현재는 ‘설’ 당일을 쉬는 대신 그 주 일요일에 보충 근무를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양력‘설’인 1월 1일에는 김일성 주석을 동상을 찾지만, 음력 ‘설’에는 주민들이 전통과 관습에 따라 지내도록 한다고. 부활한 북의 설날 역시 조상의 묘를 찾아 벌초하고, 그네뛰기, 윷놀이, 씨름 등의 민속놀이를 즐기는 모습이 전해지고 있다.

대개의 한자 문화권에서 음력‘설’을 따르는 만큼 이러한 세시풍속이 중화문화권의 사대주의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의문도 있으나, ‘한국민족문화사전’에서는“본래 주생업이 농사인 한국의 마을 사회에서 농한기인 정초에는 한해 풍년을 기원하는 축원·점세 등의 농경의례 이외에 같은 목적을 가진 갖가지 민속놀이들이 행하여졌다”며 “윷놀이·널뛰기·농악·연날리기 등의 공동오락은 가족·친족단위의 유대를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마을단위, 고을단위의 공동오락이나 연희는 집약적 노동을 요구하는 농경사회의 촌락에서 두레나 품앗이 등의 협동체계를 구현하는 모태의 기능도 겸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설’이 한민족 고유의 전통을 따르는 민족 명절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

문화재청에서는 “국민 대부분이 고향을 찾아 떠나고, 같은 날 아침 차례를 올리고, 또 새옷을 즐겨 입어, 여기에서 우리는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같은 한 민족이라는 일체감을 가지게 된다”며 “그래서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볼 때도 설날이 가지는 의미, 즉 공동체의 결속을 강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단순한 명절 이상의 기능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설’의 의미를 설명한다.

설날 등 한민족의 명절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문화재청에서 운영하는‘국가문화유산종합정보서비스(www.heritage.go.kr) 등을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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