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를 떠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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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를 떠나면서
  • 추종연
  • 승인 2008.01.3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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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종연(주 아르헨티나 한국대사관 공사)
떠나는 사람은 말이 없이 조용히 가는 게 좋다지만 지난 3년간 교포 여러분들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 몰래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려 이렇게 이임사를 씁니다.

그동안 교민 여러분들께서 저와 저희 가족에게 베풀어주신 배려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도리라고 보나 여의치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아르헨티나는 25년 저의 외교관생활 중 6번째 임지였습니다. 또한 아르헨티나는 저희가족이 희망하여 온 나라이고, 또한 저희가 원하는 때에 떠나게 돼 저희에게 복 받은 근무지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곳 근무는 유엔대표부 근무에서 그랬던 것처럼 매우 역동적이었고, 신선함이 있었습니다. 특히 자원과 문화 및 학술분야에서 새로운 업무영역을 개척한 것이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남미자원협력센터 소장으로 있으면서 우리 기업인들에게 아르헨티나에 대한 투자컨설팅을 할 정도로 전문성을 갖추게 되었고, 아르헨티나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아르헨티나를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 나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쌓았습니다.

그 전문성과 애정을 토대로 양국 국민들에게 서로를 알리기 위해 많이 노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남미자원협력센터에서 발간한 5권의 자원전문 책자가 나왔고, 15편 가량의 논문과 언론기고문도 쓸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작으나마 아르헨티나에서 한국학이 확산되는 데 기여를 한 것 같습니다.

우리문화를 지방으로 확산하기 위해 지난 해 대사관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꼬르도바 한국문화주간 행사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세계 여러 곳을 다녀보았지만 아르헨티나 교포사회처럼 문화의 향기가 짙은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고된 이민생활 속에서 언제 그렇게 보석 같은 글, 그림, 사진 솜씨들을 발전시켜 왔는지 참으로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멋과 끼를 계속 발전시켜 이민생활도 더욱 윤택하게 만드시고, 아르헨티나 교포사회의 이미지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아르헨티나의 말벡 포도주와 아사도도 그렇지만 우리 한국식당들의 고향음식 맛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만 좀 더 욕심이 있다면, 보다 개선된 시설과 서비스를 갖추어 아르헨티나 정부 고위관료들을 자랑스럽게 초대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교민사회는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으나 치안문제로 인한 어려움이 있고, 볼리비아인들과 연관된 노동착취 및 노동환경 문제도 불안요인으로 대두되어 있습니다. 특히 치안문제는 고민을 해보아도 딱 부러지는 해결책이 나오지 않아 늘 마음이 무겁습니다.

더욱이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서로가 서로를 비판해 마음에 상처를 주는 상황이 반복되어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건설적 비판도 필요하지만 어떤 때는 격려가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뿌리내리고 사는 이 나라의 현실을 인정하는 가운데 서로서로 협조하여 정보도 교환하고, 필요한 조치도 취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늘 경계심을 갖고 작은 것부터 그리고 각자 할 수 있는 것부터 예방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봅니다.

우리 교민사회는 맨주먹으로 시작해서 지금의 터전을 일군 지혜와 저력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이제 우리 교민사회는 자녀들에게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할 것 같습니다. 이들이 현지사회에 뿌리내리고, 이 나라 발전에 당당히 기여할 수 있어야 우리 교민사회의 미래가 있다고 봅니다. 부모님들이 이 나라를 그저 거쳐 가는 곳으로만 생각한다면 자녀들도 마찬가지로 이곳에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아르헨티나가 우리 자녀들의 조국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아르헨티나 한국학교의 ‘자랑스러운 한국계 아르헨티나 시민이 되자’ 라는 교훈은 참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아르헨티나 교민사회는 미국 LPGA 에서의 박세리 같은 모델들이 필요합니다. 이민 1세대는 그러한 모델을 만들어야할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 2세 3세에서 고급공무원도 나와야 하고, 정치인과 대기업 CEO 그리고 석학들도 나와야 합니다. 이 나라는 이민자의 땅입니다.

우리도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보며, 적어도 우리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고 봅니다. 후손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지원하는 모임이 결성되기를 바랍니다. 이들을 위해 거금을 쾌척할 수 있는 교포 분들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이제는 생각의 파라다임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뉴욕과 아르헨티나에서의 6년간의 공관생활을 접고, 이달 중순 서울로 귀임합니다. 지난 것들은 모두 아름답게 느껴진다고 하지만 아르헨티나에서 보낸 시간들은 제 외교관 생활의 전성기의 한 부분이었다고 봅니다. 우리 교포 여러분들의 이해와 격려가 없었다면 그러한 시간들이 가능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동안 베풀어주신 후의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제 후임 박상식 공사에게도 저에게 주신 것과 같은 지원과 협조를 당부 드립니다. 헤어짐은 또한 다시 만나는 기쁨의 기회를 주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한 기회를 고대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