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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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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평양관광 시작된다
재외동포들이 평양을 관광할 기회가 많이 늘어날 전망이다. 서울에 있는 한 여행사가 9월부터 2천여명의 대규모 평양관광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주)평화항공여행사. 지난달 금강산관광총회사와 평양관광사업 계약서를 체결했으며 이번달 통일부에서 사업승인을 받았다. 해외동포를 대상으로 한 평양관광은 일본과 미국등에서 이미 실현됐으나 한국의 여행사가 정부의 승인을 받고 공식적으로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회사에 따르면 관광대상은 한국국민과 해외동포 2천여명이며 관광지역은 평양, 남포, 묘향산, 정주, 백두산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당분간은 내국인을 우선하기 때문에 해외동포는 전체의 5~10%정도가 될 전망이다. 거주국의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가진 사람을 포함해서 재외동포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1회당 관광일정은 4박5일 또는 5박6일이며 남북의 항공기가 교대로 서울과 평양간 직항로를 통해 관광객을 수송한다. 북측이 제공하는 버스로 관광지를 이동하며 관광요금은 4박5일은 1인당 220만원, 5박6일은 290만원으로 책정됐다.
1차 관광단은 130명으로 9월15일에 2차 관광단은 122명으로 9월19일에 출발할 예정이다.
평화항공여행사는 “9월15일 출발할 1차 방북인원의 대부분은 자녀들이 효도관광 차원에서 부모님이나 장인, 장모님을 보내려고 한다”고 밝히면서 “지금까지 관광으로는 가기 어려웠던 평양 등을 방문하여 북한에 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의의가 크다고 생각한다. 해외동포의 참가상황을 가만하면서 내년에는 수용에 맞게 인원을 확대시키고 싶다 ”고 말했다.
아직 해외지사가 없기 때문에 참가하고 싶은 해외동포는 평화항공여행사(☎02-3015-1085~6) 에 전화로 신청해야된다. 이 회사는 작년 4월 (주)평화자동차가 관광사업추진을 위해 설립한 회사다. 평화자동차는 12년전부터 북한에서 자동차 생산사업을 해왔다.

<김병규이사 인터뷰> 35차례 평양 다녀온 북한통

해외동포가 평양관광을 가는 길이 열렸다. 서울에 있는 평화항공여행사가 남북정부의 승인을 받고 한국 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평양관광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실무담당자로서 이 사업을 실현시킨 김병규이사에게 물어봤다.

-이번의 사업은 어떻게 실현됐습니까?

우리 그룹은 북한에서 이미 오랜 사업 경험이 있습니다. 평양에서 보통강호텔을 15년 경영해왔고 작년부터는 자동차조립공장을 만들고 이탈리아 FIAT사의 1600CC 자동차 SIENA를 휘파람이란 이름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업을 통해서 북한 당국과도 신뢰관계를 쌓았죠. 그 속에서 관광사업의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 평양관광의 매력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까지 가기가 어려웠던 평양과 그 주변을 방문해서 경치는 물론 거기에 살고 있는 북한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남북의 교류확대나 평화정착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북한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는 실무담당 책임자로서 지금까지 35회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느낀 것은 북한 사람이 아주 순수한 사람이고 북한 사회가 빠른 속도로 변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매우 폐쇄적이었는데 요즘은 시장경제를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죠. 우리는 좋은 나라라고 선전에만 일삼고 있었던 과거와 달리 경제적인 어려움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상점의 종업원이 상품을 적극적으로 팔려고 하게 됐는데 이런 모습에도 사람의 의식변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북핵문제가 터지면서 북한이 마치 호전적인 나라로만 보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북한이 전쟁을 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고 봅니다. 전쟁을 할 수 있는 경제적인 뒷받침이 없으니까요. 좀 냉정하게 북한을 봐야합니다.

- 여행을 앞으로 어떻게 진행할 생각입니까?

연말까지 2000여명을 관광시킬 계획인데 일단 국내 사람을 우선하고 해외동포는 100~200명정도가 될 겁니다. 그것도 미국동포 위주로 합니다. 지금 Los Angeles에 있는 동포계 여행사과 제휴하려고 이야기를 진해중이고 제휴가 이루어지면 이 회사를 통해서 신청등의 절차를 밟을 수 있게 될 겁니다. 작년 가을에 시험적으로 관광객 300명을 데리고 평양에 갔다왔는데 나이드신 분이 흥분해서 쓰러지는 장면이 있었습니다.그래서 앞으로는 너무 나이 드신 분이나 건강에 문제가 있는 분은 자제해주셨으면 합니다. 젊은 사람도 섞여서 연령 배분도 생각하면서 진행시키고자 합니다.  

사이드 해외민주인사  임종인
"국내외 민주화운동가 동등한 대우를"
임종인 해외민주인사 범국민추진위 집행위원장 인터뷰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은 과거 민주화운동가 모두의 과제이자 도덕성 회복의 길이다"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가 8월7일 기독교회관에서 결성식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개별 단체별로 진행하던 활동을 하나로 모아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이룬다는 취지로 결성되는 추진위에는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이하 한통련) 대책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통일연대 등 9개 단체가 참여한다. 추진위는 해외민주인사 고향방문을 9월에 실현하는 데 힘을 집중하고 있다.

임종인 집행위원장(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부회장)을 만나 활동계획 등을 들었다.

-추진위의 활동계획에 대해 알려달라
△민족의 명절인 한가위를 즈음해 해외민주인사들이 고향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대통령 국정원장 법무부장관 등과 면담을 추진하고 각 기관에 진정서를 접수할 계획이다. 그 밖에도 홈페이지 제작, 이메일 발송, 캠페인과 기자회견, 유엔 인권위 제소 등을 포함한 다양한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은 과거 민주화운동가 모두의 과제이자 도덕성 회복의 길이다. 고향방문을 반드시 성사시킬 것이다.

-입국불허된 해외민주인사 문제 해결이 민주화운동가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건 어떤 뜻인가
△국내에서 민주화운동했던 분들은 민주화운동보상법이니 기념사업회니 해서 일정정도 명예회복이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정권핵심이 된 사람도 많다. 하지만 해외민주인사들은 한국입국도 거부되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가령 한통련은 일본에 있다 뿐이지 한국의 여느 민주화운동단체와 같은 노선을 갖고 활동한다. 거기다 조직원도 다 한국국적이다. 그런데도 영사관에서 여권발급을 거부해 한국은 물론 어느 나라도 방문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 국내든 해외든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은 똑같이 대접받아야 한다.

-정부에서 해외민주인사의 입국을 허가하지 않는 근거는 무엇인가
△해외민주인사가 한꺼번에 입국해도 안보위험이 전혀 없다는 것은 당국자들이 제일 잘 알 것이다. 국정원과 외교부의 관료주의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 현재 당국에서는 여권법과 탈퇴확인서를 입국불허의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여권이란 국민이 출국할 때 필요한 것이지 외국에 나가있는 국민을 귀국못하게 막는 게 아니다. 현재 해외민주인사 10명 정도를 원고로 해서 서울행정법원에 여권발급거부처분취소소송을 진행중이다. 탈퇴확인서도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를 명백하게 침해하는 것이다.

-입국불허된 해외민주인사의 현황에 대해 알려달라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으면서도 명예회복은커녕 한국방문도 못하는 해외민주인사들이 있다. 한통련 대책위에서 지난 7월3일 1차 조사한 52명을 발표했다. 추진위 결성식 때는 1차발표를 보완해서 자료집에 공개할 계획이다.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 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92년 8월에 일본에서 열린 원수폭(원자폭탄·수소폭탄)금지를 위한 세계대회에 보름 동안 참가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통역을 해 줬던 사람이 한통련 간부로 활동하던 신용삼이란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재일동포가 뭔지도 잘 몰랐다. 신씨를 통해 재일동포란 어떤 이들이고 한통련이 무슨 일을 하는지 처음 알게 된 셈이다. 93년에 일본에 연수를 가면서 일본이란 나라, 재일동포의 삶, 한통련, 민단, 조총련 등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강국진 기자 tengis@ngotimes.net

서브 : 외교부 재외동포현황 발표
외교부는 2003년1월 현재 재외동포와 재외국민을 총6백7만6천7백83명으로 추산했다. 이는 2001년에 비해 약7.5%(42만여명) 늘어난 수치다.

외교부가 지난 7월31일 밝힌 '2003년도 재외동포현황(추산치)'에 따르면 나라별로 보면 미국 2백15만여명, 중국 2백14만여명, 일본 63만여명, 러시아·독립국가연합 55만여명, 캐나다 17만여명 등이다. 체류자격으로 보면 시민권자가 3백3십만여명, 영주권자 1백84만여명, 일반체류자 68만여명, 유학생 23만여명이라고 밝혔다.

2001년에 비해 재외동포가 증가한 국가로는 중국(25만여며), 러시아·독립국가연합(3만여명), 미국(3만여명), 캐나다(2만9천여명) 등이다. 외교부는 해외유학생, 자영업자, 주재상사원 등이 늘어난 것을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반면 아르헨티나(9천여명), 멕시코(2천여명), 일본(1천여명), 중동(6백여명), 아프리카(1백여명) 등은 재외동포가 감소했다. 중남미 지역경제침체로 인해 다른 나라로 재이주, 중동지역 노동자감소 등이 주요 감소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고 외교부는 밝혔다. 강국진 기자 tengis@ngotimes.net


뉴욕한인회 “700만 재외동포 바로 알리기” 캠페인

올해 미주이민 100주년을 맞아 뉴욕 한인회를 중심으로 ‘700만 재외동포 바로 알리기’ 캠페인이 전개되고 있어 관심을 끈다. 이제 한국은 물론 전 세계 살고 있는 한민족의 힘을 한데 모으자는 것이 이 캠페인의 취지이다.

“재외동포들에게는 정체성 극복과 자신감을, 본국 국민들에게는 재외동포들에 대한 인식을 바로 심어 주겠습니다” 세계 한인지도자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고국을 방문중인 김기철(51) 뉴욕한인회장의 말이다. 같은 혈통을 가진 동족이지만 한국근세사 순환과정에서 생성되어 지금까지 타민족과 더불어 타문화 환경의 역경을 극복해온 사람들이 재외동포라는 것, 또한 이들이 이제 무한경쟁세계화에 준비된 첨병으로, 한국문화와 그 전통을 전파하는 문화전도사로, 한국의 세계화와 선진화에 기여할 차세대 전도사로 조국에 크게 기여할 것임을, 이번 “700만 재외동포 바로 알리기” 캠페인를 통해 피력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뉴욕 한인회에서는 조국의 위상에 기여하거나 해외동포들의 중요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사례, 또한 이번 캠페인 전개방식에 대해 이메일(KAAGNY@nykorean.org)이나 전화(212-255-6969) 또는 팩스(212-633-1627)를 통해서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전문가들을 패널로 한 포럼도 곧 개최예정이다.

1단 박스
본지 전 편집위원장 이종훈씨 사무실 개소식

본지 국내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던 이종훈씨가 홍대입구에 국정경영원(iGM) 사무실을 마련하고 9월18일 낮12시부터 오픈행사를 갖는다. 이씨는 내년 총선 출마를 앞두고 마포을구에서 출마 채비를 갖추고 있다. 이날 "정치가 즐거워지면 코끼리도 춤을 춘다"라는 저서의 출판기념 사인회도 갖는다. 저녁 9시까지 진행되지만 저녁7시에 공식행사를 갖는다. 장소 : 서교타워 빌딩 608호(지하철 홍대입구역) *문의전화 02-3141-0231


<4면전면>
재외동포현안 긴급3자회담
충격증언 "재외동포법 제정 반대할 테니까 협조해달라"
한국 외교부, 중국 미국 정부에 공문보내

참석자 : 이광규교수/ 김길남 미주총련 회장/ 이형모 재외동포신문사 사장

지난 99년 제정됐던 재외동포법이 헌법재판소에서 한정합헌 판정을 받아 올 연말까지 법을 개정해야 한다. 연말이 다가옴에 따라 법개정에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쪽의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본지는 한인지도자회의 참석차 방한한 김길남 전 미주총련회장과 이광규교수 그리고 본지 이형모 사장을 모시고 긴급 좌담회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김길남 전회장은 재외동포법이 통과되기 직전 김대통령의 의중과 밥무부 외교부등의 긴박하게 돌아갔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우리 외교부가 법제정을 반대하면서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중국 미국정부에 협조를 구하는 공한을 보냈다는 증언이다. 이 공문서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미 99년 당시 중앙일보가 보도한 바 있으나 외교부는 즉시 이 사실을 부인했었다. 공문 사본 소유자들의 제보를 바란다.--편집자  

1. 외교부에서 미국 중국 정부에 의견 구하는 요청서 보내
이광규: 재외동포법은 김대중대통령이 미국 갔다 오던 중 비행기에서 박상천 법무장관에게 지시해 입법 조항을 통과시켰는데, 같은 민주당 내에서도 모르는 채 이루어졌습니다. 법무부가 이를 통과시킬 수 있었던 대의명분은 처음에는 혈통주의였는데, 그 후에 중국의 과거국적법이 더해졌습니다. 조항이 통과되자마자 9월 1일 본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명동에서 단식투쟁을 했고, 이 소식을 들은 청와대는 사람을 보내 우릴 해산시키려 했습니다.    

김길남: 그때는 마침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에 대한 법적 지위가 문제가 되던 시기였습니다. 국내에서는 서경석 목사 중심으로 시민연대가 재외동포관련 활동을 하고 있었고, 본인은 미주한인회 회장으로서 재외동포입법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했지요. 외교통상부는 처음부터 국적주의든 혈통주의든 재외동포에 관한 입법제정에 대해 반대했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이 박상천 장관한테 법무부입법으로 혈통주의법초안을 마련케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견조율과정에서 외교통상부의 반대가 워낙 강경했기 때문에 혈통주의 대신 국적주의로, 즉 국적을 취득한 자의 직계존비속의 개념을 삽입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기울었던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법무부에서 적극적으로 법안을 추진하자 외교통상부는 불리하다 느낀 듯 합니다. 외교통상부는 갑자기 중국의 외교부장관 앞으로 200만에 달하는 한국계 조선족들에 대해 중국의 의견을 묻는 편지를 보낸 겁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이번에 재외동포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제정에 반대할 테니까 좀 협조해달라고 요청을 한 거죠. 상상할 수조차 없는 처사입니다. 게다가 같은 내용의 편지를 미국무장관한테도 보냈다는 데에 경악을 금할 수 없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미국무부에서 아무런 답이 없자 다시 편지를 보냈는데, 그제서야 미국은 미국 교과서에서 나와 있는 내용을 답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즉 미국시민으로서 동일한 외교적 처우를 받아야 하는데 혈통을 이유로 한국에서 특별혜택을 받는 것은 민주주의의 보편원칙에 있어 문제가 된다는 것으로 우리 외교통상부가 기대하던 답은 아니었죠. 중국 외교부장관의 답변과 달리 미국은 상당히 비협조적이었습니다. 그러자 외교부는 고용시장교란을 들면서 노동부가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혀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가령 150만 재일동포들이 일시귀국하면 한국 노동시장이 교란되고 큰 문제가 된다는 식의 의견을 제출해달라고 했지만 그것도 잘 안됐지요. 그러자 외교통상부는 탈북난민, 조선족, 중국에 집단으로 들어오는 간첩들에 대한 국제적 견해는 어떠한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며 이번에는 국정원을 부추겼습니다. 일이 여기까지 이르자 김대중 대통령도 결국 국적주의로 바꾸자는 데 합의했던 겁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여야 모두 이것은 하위법 중 재외동포재단법에 나와있는 출입국주의에 반하며 법률적 형평성에도 어긋난 것이라고 반대했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법안 성립자체가 어려울 듯해서, 일단 먼저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하자는 의견이 나와 본인도 이때 많이 노력했습니다. 법을 먼저 만들고 나중에 개정하는 것은 오히려 쉬울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현재 법무부, 외교통상부에서 정부안을 만들었고, 국회에서 조홍규 의원이 안을 내놓은 상태입니다. 할 일이 산적해있는 국회의원들에게 이 법안은 그다지 매력 있는 것이 아닐 겁니다. 재외동포관련법을 잘못 만들었다가는 욕만 먹기 쉬우므로 오히려 기피할 수도 있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나온 법안들에 대해서 외무부, 법무부, 국회 모두 관심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최근 재외동포 법적 지위 향상 대책 특별 위원회를 구성되었는데 본인이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고, 5대양 6대주에서 11명이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대책위원회가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시민연대가 이를 돕고 후원해주기를 바랍니다.
이광규: 재외동포법에 대해 국회의원들이 성의가 없다는 것은 본인도 공감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세미나가 있어 국회에 간 적이 있는데, 조웅규 의원, 송석찬 의원은 참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전 토요일 재단에서 연락이 와서 갔더니 권병현씨 이야기가 지금 나온 법안에 대해서 외무부, 법무부, 국회 모두 관심이 없으니 나보고 앞장서라는 겁니다. 이번 재외동포법개정은 소중한 기회이며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대표자대회에 오신 분들에게 사인을 받거나 명단을 입수하여 위임을 받거나 해서, 외교통상부를 비롯하여 관련부처 장관 및 여야 국회의원들을 일일이 찾아가려고 합니다.
1. 글로벌코리안네트워크 외교통상부 패러다임 바뀌어야
이형모: 말씀을 들어보니 이교수님과 김회장님 모두 이 분야의 희귀한 권위자들인 것 같습니다. 사실 재일동포특례법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재외동포를 잘 다독거려야 우리도 잘 살수 있다는 거시적 차원의 경제적 이익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달러 몇 십 억이 대가도 없이 들어올 수도 있다는 거지요. 더욱이 혈통을 사랑한다는 한국사람이 같은 핏줄의 동포들을 도외시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모든 법안 존재의 필요성외에도, 외교통상부가 국가 경영상 혹은 국제관계상 법안폐지명분을 만들어내도,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글로벌코리안 네트워크라는 열린 공동체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글로벌코리안네트워크는 대세입니다.
김길남: 국적은 선택할 수 있어도 민족은 선택할 수 없습니다. 단일민족공동체만이 우리민족이 살아갈 길입다. 지금 미국 120개 소수민족이나 중국 51개 민족과 같은 다민족일국가보다 다국적 단일민족공동체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이라 생각합니다.  
이형모: 김회장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먼 미래를 내다보면, 다국적 단일민족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 다국적 한국문화공동체면 더욱 좋을 겁니다. 한국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한국인을 5천년동안 묶어올 수 있었던 것은 혈통이 아니라 오로지 문화였음을 상기해볼 때, 한국문화를 사모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혈통만을 강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입니다.
1. 연방법원 버클로 판사 이야기
김길남: 궁극적으로는 한민족 공동체, 한민족문화권이 기본목표라고 확신합니다. 참고로 연방법원 여성판사 버클러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날 한인회회장에게 버클러라는 여성이 연방법원 판사 임명건으로 클린턴대통령에게 추천서를 써달라며 팩스를 보냈답니다. 7장이 넘는 긴 지면을 통해 그녀는 일생을 서술하였는데, 법조인으로서의 평생 살았으나 자격이 없다고 고백했답니다. 법은 피부색과 인종차별 없이 집행돼야 하는데, 정작 자신은 그런 법조인으로서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불임진단을 받은 그녀는 이제야말로 인종이나 종교, 어떠한 개인적인 편견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롭기 위해서 한국아이를 두 명, 그것도 소아마비 아이들을 입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미국시민이 되었지만 한국인이었던 아이들을 위해서, 버클러는 연방법원 판사임명을 앞두고 대통령보다도 한인회회장을 먼저 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인회 회장에게 받은 추천서를 가지고 연방법원판사 취임식을 하면서 소아마비 두 한국인 아들딸을 자신 있게 소개하는 버클러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한국인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기에 한국과 한국문화를 사랑하고 나아가 스스로를 명예한국인이라 불려지는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던 버클러의 이야기는 우리모두가 나누어야 할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법조계도 버클러로 인해 신선한 충격을 받기를 바랍니다. (웃음)
1. 해외동포 공작대상 아니다
이형모: 김길남 회장님이 재외동포법에 대한 국내외의 무관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현재로서는 국회의원 조웅규 의원이 재외동포법에 대해 책임지게 하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김회장님은 그 동안 실사구시적인 역할을 많이 해오셨던 분이니까 앞으로 활발한 로비와 운동을 통해 조웅규 의원에게 그 의사를 확실히 전달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코리안 네트워크에 대한 패러다임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한국이 상위에 재외동포는 하위에 있는 것으로 인식했던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세계각지에 퍼져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위아래 없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글로벌코리안 네트워크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삼아야 할 때입니다.
김길남: 재미동포들이 다른 해외동포들에 비해 숫적으로 많지만 이민1세들이 사라지고 영어권의 2,3세들이 주류를 이루는 시점이기 때문에 본국으로부터의 문화수혈이 절실합니다. 그동안 재미동포들을 북한체제를 홍보 선전하기 위한 공작대상이나 생각하거나, 무슨 총독 같이 온 한국 외교대사들의 관리대상으로 여겼다면 이런 고정관념은 바뀌어야 합니다. 재미동포들도 글로벌코리안 네트워크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지만, 조국의 많은 관심과 후원이 뒷받침되어야 그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1. 한민족 정체성 잃지 않으면서 거주국에서 모범시민 되어라
김길남: 외교통상부 외교백서에 한국정부의 재외 동포에 대한 기본정책이 나와 있는데, 거주국의 모범시민으로 한국인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라 즉,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거주국의 모범시민이 되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형모: 외교통상부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과 거주국의 모범시민이 되는 것 두 가지를 함께 이야기했다는 것은 저도 잘 몰랐습니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거주국의 모범 시민이 되라는 외교통상부 외교백서의 기본정책은 헌법 2조에 재외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한 것과 함께 매우 적절히 사용될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한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재외국민 보호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김길남: 그렇습니다. 재외동포와 국내동포와의 연계성, 재외동포를 위한 국내활동 방향 등은 외교백서에 잘 명시되어있습니다. 논의가 잠시 확대된 듯하나, 재외동포는 법률적으로 여섯가지 신분이 있습니다. 첫째, 거주국민, 둘째 거주국 영주권자, 셋째 일년 이내 체류자, 넷째 장기체류자, 다섯째 불법체류자, 마지막으로 무국적동포, 이렇게 여섯 가지 법률적 신분으로 재외동포들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현행 재외동포특례법에서는 불법체류자와 무국적동포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무국적동포의 대표적인 예는 일본의 조총련 동포들, 중국에 살면서 조선인민공화국 여권을 가지고 있는 북한 국민들이 있지요. 조웅규 의원이 제출한 안에는 이들 무국적 동포 범주도 포함되었습니다. 사실 140여 국이 넘는 나라에 우리동포가 흩어져 살지만, 사우디, 남아공을 비롯한 곳곳에서 영주허가를 받지 못하고 귀화도 못하며 사는 동포가 많습니다. 다음으로 문제되는 것은 한국여권과 거주국영주권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한국여권은 있으되 주민등록증이 말소되어 없으므로, 여권상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이어도 한국에 나오게 되면 외국인 취급을 받게 됩니다. 은행계좌를 갖거나 집을 사는 등의 모든 일들을 일체 할 수 없어 한국인이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거의 없지요. 현재 영주권을 가지고 일본에 거주하는 50만 동포들, 그리고 총 재외동포 인구 중 200만 정도가 이 범주에 들어갑니다. 마지막으로는 일시체류자, 장기체류자의 문제가 있는데, 이들의 참정권을 회복하는 문제는 이미 선관위에서 검토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두가 국민이라는 커다란 카테고리에서 논의되어야하며 우리 모두의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1차교열, 27.5매)

5명 특집
태평양을 두 번 건넌 사람
안동일 개혁국민정당 대변인
겉모습만으로는 그 사람의 내력을 쉽게 알 수 없는 경우가 가끔 있다. 개혁국민정당 안동일(44) 대변인도 그런 사람중의 하나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약간 희끗희끗한 머릿결이 외모에는 별 신경을 안 쓰는 눈치다. 한여름 더위로 땀에 젖은 탓인지 입고있는 양복도 어딘지 후줄근해 보였다. 미국생활만 22년, 인생의 절반을 미국 뉴욕에서 보낸 셈인데 세련된 '뉴요커'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더구나 신생 정당이라고는 하지만 어엿한 공당(公堂)의 대변인인데, 그런 걸로 티를 내는 것은 애당초 싫어하는 것 같았다.
지난 8월 하순 어느 날 기자가 찾아간 날도 그랬다. 이미 한두 차례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전혀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취재'를 당한다는 긴장감이 전혀 없었다. 약속장소도 여의도 무슨 역의 몇 번 출구 앞에서 만나자는 식이다. 막상 만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어디 가서 뭘 먹을지'에 대한 의논이었다. 보통의 정치인이라면 음식점 한 군데 미리 예약해놓은 채 점잖을 뺐을 법도 한데... 아무튼 흥미로웠다.
식사 후 자리를 옮긴 곳은 서울 영등포에서 열린 지역행사. 안 대변인으로서는 이 지역 당원들에게 처음 인사하는 자리다. 하지만 스스럼이 없기는 여전했다. "반갑습니다. 대변인을 맡고있는 안동일입니다"하고 인사한 뒤 방바닥에 철퍼덕 앉는다. 그리고는 주변 당원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대며 '작업'을 시작한다. "어느 지역(위원회)에서 왔어요?" "동작구요" "이런 촌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네" "여기가 촌인가요?" "동작에 비하면 촌이지 뭐, 어어 농담이요 농담. 여기 분들 들으면 화내겠네. 허허"

작년 대선보며 귀국 결심

서먹했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도 간간이 들리기 시작했다. 안 대변인은 이런 분야의 작업에 일가견이 있다. 누구를 만나도 격의 없이 상대방에 파고드는 친화력의 소유자다. 나이가 어리거나 엇비슷할 경우에는 대충 말을 낮추면서 관계를 튼다. 나이나 사회적 위치상 어려운 상대를 만나도 비슷할 것 같다. 그러면서도 결코 불쾌한 감정을 남기지 않는 기술을 갖췄다. 이를테면 사람과 사람간의 경계를 낮추는 전문가인 셈이다.
친화력이 그의 가장 큰 무기라면 그 바탕에는 솔직함이라는 동력이 깔려있다. 가식없이 속내를 털어놓기 때문에 조금은 당황스러울 정도다. '내가 이 만큼 속사정을 내보였으니 너도 그 만큼 털어놓지'란 격이다.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는데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지나친 자신감, 또는 경박함으로까지 비춰질 법하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말이라고 함부로 다 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풍토에 비춰 더욱 그렇다.
이쯤 되면 말 때문에 집권 초기부터 말이 많았던 어느 분과도 '코드'가 맞는 것 같다. 사실 안 대변인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승리가 귀국을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라고 밝혔다. 그는 지난 6월 귀국 직전 뉴욕에서 개최한 자신의 후원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국정치에 대해서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왔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해왔던 것이 사실이지만 미국생활이 오래 지속되면서 그저 스쳐간 막연한 꿈이라고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서울을 방문했을 때 새로운 감회를 받았고 그게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7년만의 귀국이었던 그때, 한국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엄청난 감동을 받았습니다. …(중략)… 그 무렵 2002년 11월말 12월초의 분위기는 폭풍전야의 고요함이었습니다. IMF 극복이며 월드컵 4강신화의 구축으로 이어진 민족 에너지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으로 다시 분출됐다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노 대통령의 당선이야말로 제 인생을 뒤흔든 일대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후략)… "
그러나 이 같은 '솔직한 고백'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사람은 요즘 세태로 볼 때 많지 않을 것 같다. '솔직함'이 의심받고 공격당하는 세상이다. 그의 말처럼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과 한국사회의 변화, 발전'이 과연 불혹을 넘긴 나이에 미국 내에서의 기반과 입지를 포기하고 고국에 돌아 올만한 이유가 될 수 있는지, 궁금증을 낳는다. 아무튼 그는 이번에 귀국을 결심하며 미국 시민권을 반납했다. 사족을 달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면 미국정부가 6개월간의 유예기간을 준다고 한다. 그 따기 힘들다는 미국 시민권을 스스로 반납하는 경우가 매우 드문 상황이다보니 '당신의 선택이 후회되지 않도록 한 번 더 생각할 기회를 준다'는 의미인 셈이다.

운동권은 무슨... 그냥 순진한 학생이었죠

솔직함에 대한 의심은 '왜 미국으로 갔나'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어려웠던 시절 고국을 떠났다 이제 돌아오는 이유'에 대한 물음도 내포돼 있었다. 그는 폭압정치가 한창이던 전두환 정권 초인 지난 81년 겨울 미국으로 건너갔다. 돌아온 대답에는 한 사내의 간단치 않은 인생역정이 담겨있었다.
"당시 시국이 하수상해 잠시 몸을 피하러 간다는 것이 돌아오는데 22년8개월이 걸렸습니다"
지난 77년 동국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 안 대변인은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다 이듬해 10월 긴급조치 위반으로 검거됐다.
"나는 뭐 운동권도 아니고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어요. 다만 남보다 좀더 순수했다면 순수했죠. 순진하다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모르고..."
당시 동국대 문리대학장이었던 김희규 교수가 갑작스레 실종된 뒤 변사체로 발견된 사건이 발생했다. 학생기자였던 그는 여러 정황상 정보기관의 개입을 확신했고 '의문사 의혹'이라는 제목으로 학보 발간을 준비했다. 하지만 학교당국에 의해 인쇄가 중지되자 지하신문 형태로 소식지를 발행했다 적발된 것이다.
"의식화니 뭐니 그런 건 없었어요. 학생기자도 기자랍시고 있는 사실 그대로 알리려고 한 것뿐이죠. 당시 학생과에 상주했던 중앙정보부 직원이 사건발생 직전에 "김 박사가 어디어디를 지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아는 선배가 우연히 엿들었다는 거예요. 그 교수가 평소 과격한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온건한 성품인데, 강의 중 잠깐 내뱉는 말로 박정희 정권을 비난한 것이 화근이 됐다고 생각했죠. 재작년엔가는 의문사 진상위에도 올렸는데 아직까지 별 소식이 없네요"

사람도 못먹는 금치를 던져?

이 사건으로 그는 징역 2년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 구치소에서 복역하다 아홉달만에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하지만 감옥까지 갖다오고도 '순진한'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좀 어리숙했죠. 한 번은 전경들에게 돌멩이 대신 김치를 던졌다고 동대문서 정보과 형사들에게 엄청나게 맞은 적도 있어요"  
그는 지난 79년 여름 유신정권이 말기로 치닫던 무렵의 일이다. 서울의 어느 성당에서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온 학생운동 동료들을 환영하기 위한 모임을 준비중이었다. 상 위에는 떡과 막걸리, 그리고 문제의 김치도 차려졌다. 그런데 경찰이 덜컥 집회를 원천봉쇄 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런 모임마저 못한다는 사실에 분개한 그는 김치통을 들고 나섰다. 김치로 형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겨냥했고 곧 형사들의 와이셔츠며 점퍼는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김치 투척 사건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색적이면서도 불쾌한' 무기에 열이 잔뜩 달아오른 경찰은 그를 집중 추적해 붙잡은 뒤 씩씩거리며 발길질과 주먹세례를 퍼부었다.
"김치통을 버리고 뛰었어야 했는데 아까워서 끼고 있다가 그렇게 당했죠. 그때 김치가 무지 비싸서 금치라고 했거든요. 경찰도 날 패면서 그럽디다. 이놈의 자식, 사람도 못먹는 금치를 던져?"
80년 초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학교에서 제적됐던 안 대변인은 복학해 이번에는 동국백서라는 제목의 또 하나의 '불온문서' 제작에 참여했다. 유신정권의 몰락으로 생긴 열린 공간속에서 학내외의 제반 부조리를 폭로, 시정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너무 짧았다. 그 해 5월 광주에서의 일로 인해 또다시 수배자 명단에 올랐고 그 이듬해 도피성 미국유학의 길에 올랐다. 태평양을 처음 건넌 것이다.
그런데 한 1년만 머물다 온다던 미국생활은 뜻밖의 일로 길어졌다. 미국 도착 후 한 달여 만에 '불교 사회주의 사건'이라는 대규모 조직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그 사건도 알고 보면 참 우스운 사건입니다. 200명이나 무더기로 걸려들고 당국은 조직도까지 그려가면서 마치 간첩단이나 잡은 것처럼 떠들어댔는데, 그 시절 다른 사건도 그랬겠지만 엄청나게 뻥튀기된 겁니다. 뭐 좀 의식화돼 있긴 했지요. 하지만 정부가 밝힌 것처럼 사회주의에 경도되고, 뭐 그런 건 절대 아니었거든요. 불교계통 학생단체들이 지방에서 MT 비슷하게 모여서 세미나 같은 걸 하는 자리였는데, 보고있는 책이나 문서들이 이상하니까 등산객의 신고로 잡혀 들어갔어요. 그런 어수룩한 지하조직도 있나요?"

임수경 단독취재때 가슴 뿌듯

아무튼 이 사건으로 안 대변인은 5공화국이 거의 끝날 때까지 돌아갈 조국을 잃어버렸다. 생계를 위해 선택한 수단은 동포신문 기자였다. 이 때부터 그는 언론인으로서의 이름을 국내외에 알리게 된다. 매일신문을 시작으로 미주 동아일보와 미주 세계일보 기자, 라디오 서울 앵커 등을 거치며 족적을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89년 임수경씨의 평양방문 독점 취재. 미국 시민권자 자격으로 북한취재가 처음이 아니었던 그는 당시 평양축전 취재를 위해 북한에 들어갔다 임수경이란 존재를 알게된다.  
"눈이 번쩍 뜨이는 사건이었죠. 기자로서도 행운이었지만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 가슴 벅찬 기억들이었습니다. 특히 (임)수경이가 북한체제를 무조건 찬양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방식대로 당당히 행동하는 모습, 그리고 그런 수경이의 행동에 처음엔 낯설어하다가 점차 열광하는 북한 주민들, 이런 것을 직접 보고 기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저는 정말 행운아입니다"
임수경 특종으로 그는 최고의 성가를 올렸지만, 그와 동시에 당시 북한취재를 지원했던 소속 신문사를 떠나야 했다. 이번에도 대충 굽히지못하는 그의 성격이 원인이 됐다. 북한취재기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소속 신문사에서 연재를 못하게 되자 진보적인 모 월간지에 게재했고, 이를 다시 한겨레신문이 특집으로 실은 것이다. 대노한 경영진은 그를 곧바로 해고했다.

윤도현의 눈물

이처럼 소신을 쫓는 그의 행동을 보다보면 자신감을 넘어선 당돌함마저 느껴진다. 최근 연재중인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의 고정란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태평양을 두 번 건넌 사람들'이라는 코너에는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에 대한 기억을 담고있는데, 이들과의 인간관계의 단면을 거침없이 소개하고 있다. 일면 과시적인 욕구로 읽혀질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실관계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는 당당한 노력인 듯 싶다.
이와 관련, 최근 개혁국민정당 홈페이지에 올린 칼럼 한 편은 그의 진정성을 엿보게 한다. '윤도현의 눈물과 레이건의 편지'라는 글은 지난해 윤도현 등 남한가수들의 북한 방문공연을 소재로 삼고 있다.
글은 "나는 가수 윤도현에 대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알지 못했다"고 시작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북한 주민들도 윤도현을 몰랐고, 따라서 윤도현의 울부짖는 듯한 창법은 물론 소매없는 티셔츠 등 자본주의적인 기괴한(?) 외모에도 무척이나 낯설어하며 차가운 반응이었다고 글은 적고 있다. 하지만 윤도현이 마지막으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를 때 감정에 복받친 윤도현이 눈물을 주르르 흘렸고, 감정이 전이된 북한 관중들도 감동의 물결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이후 평양텔레비전은 윤도현의 눈물을 몇 번이나 재방송했다.
안 대변인은 끝으로 이렇게 적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진심과 진정은 어디서나 통한다는 것이다. 어떤 장벽도 뚫는다는 것이다. 통일을 노래하며 눈물을 흘렸던 윤도현의 진심이 북한의 완고한 관중과 방송국 사람들을 변하게 했듯이 바람직한 개혁을 원하는 우리의 간절한 바람도 자신을 던짐으로써 진심으로 다가설 때 완강한 사람들을 변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총 31.4매
길 경우 중간에 서체가 다른 부분(약 2.5매)을 들어내시기 바랍니다.


사진 설명
1. 작은 사진 : 안동일 대변인이 개혁당사 회의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2. 큰사진 : 지난달 세계한민족지도자대회 참석차 서울을 방문한 김기철 뉴욕 한인회장과 롯데호텔에서 만났다. 뉴욕은 안동일대변인이 미국 체류시 줄곧 거주해온 도시로 그의 제2의 고향이라할 만하다. 김회장은 그의 고향친구인 셈이다. 홍제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