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어데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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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어데 있나…
  • 이헌구(화가)
  • 승인 2007.04.1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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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에서 운남까지 ‘언제 들어도 가슴 아릴듯 행복하게 만드는 곳’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토요일 오후에 서둘러 북촌으로 향했다. 몇 개월 만에 만나는 그리운 친구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 남한 면적의 약 100배 정도 되는 커다란 나라 중국.

그 중국의 서남부에 운남성이 있는데 위로는 티벳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라오스, 미얀마,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일개 성의 크기도 남한 면적의 약 5배가량 되는 운남성은 성의 중심에 곤명이라 하는 도시가 있다.

이곳은 보이차와 커피로 유명하고, 사계절 내내 꽃이 끊이지 않고 피어 꽃의 도시라고 불리며, 사시사철 온난한 기후로 여름에는 섭씨 20도 남짓하며 ‘겨울에도 8도 이하로 내려가는 일이 거의 없이 항상 봄 같다’하여 춘성(春城)이라 불리운다.

근래 이곳 운남을 방문하는 한국인 관광객이 급증하였는데 성도(우리의 도청소재지정도)인 곤명에 우리나라 사람이 개설한 여행자를 위한 정보센터가 있다. 이곳을 매개체로 하여 만난 친구들, 일시는 다르지만 같은 여행지를 다녀왔다는 공감대와 여행을 가고자 준비하는 사람들을 서울의 한복판에서 만나는 날인 것이다.

어려서부터 역마살이 붙어 어떠한 여행도 마다하지 않는 편인데 운남(雲南)이란 곳은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 감정이 남다르다. 작년 여름에 보름을 다녀 온 후 지난 겨울에도 20일을 다녀왔다.

지인 중에 어떤 이는 “그곳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길게 두 번씩이나 갔다 왔노?”라고 묻는다. 물론 운남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온화한 날씨, 풍부한 과일, 저렴한 경비 등 장점들도 있지만, 내가 오지 여행을 즐기는 느낌의 감정은 한 마디로 ‘향수’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아기를 업은 어머니는 단발머리 소녀의 손을 잡고 줄줄이 연결되어진 허름한 가옥으로 사라지고, 좁은 골목일지라도 익숙한 놀이공간이 되어 있어 인원에 구애받지 않으며, 밝게 놀고도 잘 씻지 못한 찬바람 부는 따리 리장의 아이들은 불그레한 두 볼과 콧잔등에 흐르는 콧물을 소매로 훔치고는 한다.

코가 딱지 진 모습에 갈라진 손등의 이들 아이들이 어쩌면 세상을 달리 살고 있는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까지 미치면 가슴 깊은 곳에서 저려오는 아련함이 머리끝으로 솟구쳐 올라온다. 그렇게 햇무리가 어스름해 질 때 밥 짓는 회색연기는 피어오르고, 그 골목의 구슬치기하던 어린 사내아이는 기나긴 세월을 그저 그리움의 시간으로 삭히곤 하였다.

여행 친구는 갑자기 “고향이 어데세요?”라고 묻는다.

말 한마디로 느끼는 감정의 깊이는 무한하다. 생각만으로도 괴로움을 느끼는 단어가 있으며, 정다웁고 아름다운 행복의 단어도 있다. 그 가운데 고향이란 단어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아릴 듯 하면서도 행복해진다. 참으로 오랜만에 되새겨 보는 고향이다.

장항선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지금은 간이역처럼 되어버린 바다냄새가 밀려오는 도고온천역이 있다. 예전에는 이곳이 선장역이였으나 이름이 바뀌었다. 현지인들은 '궁밭'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렀었다.

역에서 나와 정육점에서 고기 몇 근을 끊고는 구불거리는 언덕을 오르고 다시 내려가다 보면 길 왼쪽에는 가마터가 있고 오른쪽 밭 자리에는 벌건 황토흙이 지천으로 있었다. 큼지막한 항아리들과 깨진 조각들로 미루어 옹기를 만드는 곳이었다.

그렇게 걷다보면 차 다니는 길이 나오는데 이 길이 온양에서 예산 가는 길이다. 비포장 1차선 길이 현재는 4차선 도로로 바뀌었다. 그곳 갈티고개는 지금 도로 포장 때문에 사라졌다.

고개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충청남도 서해쪽에선 제법 높은 산인 도고산(높이 482m 정상에 서면 예당평야와 아산만은 물론 멀리 천안 시까지 한눈에 들어와 서해안의 초계와 방어를 위한 군사적 요지로 유명한 곳이다)이 보이고, 조금 더 가면 왼편에 바다처럼 넓은 저수지가 나타난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만 같던 도고저수지(지방 사람들은 간밭저수지라 불렀다)를 지나면서 시선은 목화밭쪽에 더 많이 두었다. 이 절벽에서 수도 없이 떨어지는 꿈은 간밭저수지의 잔상 이었음일 것이다.

나는 송방(요즘의 슈퍼마켓)이 있는 평나무쟁이의 평상에서 중간 고개를 넘기 위해 잠시 쉬었다간 화천리를 가기 위해 가끔은 달음박질도 하고, 어쩌다 지나는 차로 인해 먼지를 뒤집어 쓰기도했다. 걷다보면 마지막 고개인 농은리고개가 나오는데 이 고개를 경계로 다시 아산군과 예산군이 나뉜다.

몇 번은 쉬어야 고갯마루에 들어서고, 산길을 따라 솔잎 향 맡으며 굽이돌아 내리막길을 날듯이 내려가면 30여 가구 되는 조그만 마을이 나온다. 한 낮에 걷기 시작한 발걸음이 저녁 밥 짓는 연기를 보면서 고향집에 도착하곤 했다.

인사는 목례가 아니라 넙죽절이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친척 어른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사가 끝나면, 멍석 깔아놓은 마당엔 어느새 밥상이 차려지고 그 옆에는 모깃불을 놓는다. 재가 묻어 있는 뚝배기된장, 열무김치에 나물 두어 가지 반찬이면 꿀맛이다.

밤은 길어 하늘에선 별이 쏟아져 내릴 듯 맑게 빛나고 등잔불은 너울거리며 춤을 추는데, 멀리서 늑대 울음처럼 개 짓는 소리가 간혹 들리고는 했다. 마실 나온 어른들과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많은지 충청도 느려터진 억양은 자장가 부르듯 하여 아이들이 꿈나라로 날아가고는 한다.

농가의 아침은 쇠죽으로 시작한다. 농민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인다. 황소는 콧김을 훅훅 불어내며, 짚을 끓여 만든 여물을 우직하게 먹는다. 풀만 뜯어 먹고도 덩치가 크며 힘든 농사일을 다 해내는 어미 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헛간을 수색해 계란이라도 발견하면, 운이 트인 날이다.

연료라고는 나무밖에 없던 시절이다. 낮이면 집집마다 땔감을 구하려 지게를 지고 뒷산을 오른다. 젊은이들은 톱 대신 커다란 망치나 갈쿠리를 가지고 간다. 산에 가도 나무가 별로 없으니 나무 밑둥 썩은 고주백이나 떨어진 솔잎을 긁어 한 짐 해오면 목표가 달성되는 것이다.

60년대에 세상물정을 조금 아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언제나 필리핀처럼 잘 살게 될까?” 그리고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외국에 수출할 수 있는 것은 푸른 하늘과 맑은 물 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40여년이 흐른 지금, 당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이제 선장역에 내려서 고향까지 한나절 걸리던 길을 승용차로 10여 분이면 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출세해서 자가용 몰고 고향 오라던 그 자가용을 요즘에는 누구나 소유할 수 있으며, 물질의 풍요를 누리는 세상으로 변모하였다.

깎아지른 운남의 호도협 협곡의 중턱을 걷고 있는데 숲을 헤치며 등에 작은 나뭇짐을 지고 천천히 오르는 가냘파 보이는 할머니가 예전 우리모습이다. 잡아주려고 손을 내밀었더니 웃음 띤 얼굴로 괜찮다는 손짓을 하는데, 한없이 많은 주름 안에서 번지는 그 미소는 평안함이 넘치는 우리들의 할머니 모습 그대로였다. 머나먼 타국의 가난한 고장에서 이렇게 우연히 고향의 향수를 맡게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