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자유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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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자유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 이종태
  • 승인 2006.12.29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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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태 (쾌도난마 한국경제 저자)
아직도 담배를 피우십니까. 혹시 “담배를 끊는 것보다 차라리 숨을 끊는 게 낫다”고 생각하시나요?(반갑습니다!) 그러나 담배가 건강과 사회생활에 치명적이란 것쯤은 당신도 알고 계실 겁니다. 이런 당신을 위해, 여기 미국 ‘호러 장르’의 대부인 스티븐 킹이 자신의 단편소설 「금연주식회사」를 통해 추천하는 ‘확실한’ 금연법이 있습니다.

중년의 회사원이자 ‘골초’인 모리슨은 어느 날 케네디 국제공항에서 대학동창인 맥칸을 만난다. 모리슨은 청년 시절부터 줄담배로 유명했던 맥칸이 담배를 끊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란다. 더욱이 담배를 끊은 덕분인지, 맥칸은 모리슨보다 훨씬 젊고 건강해 보이며 회사에서도 최고 경영진에 올라 있었다. 모리슨은 맥칸으로부터 금연주식회사라는 곳을 소개받는다. 일단 회원이 되면 “금연은 틀림없다”는 다짐과 함께. 그러나 며칠 후 금연주식회사를 방문한 모리슨은 담배를 끊을 수밖에 없는 ‘틀림없는’ 방법을 알고 경악하고 만다.

금연주식회사는 회원들의 일상을 물 샐 틈 없이 감시한다. 탈퇴하면 살해한다. 담배를 피우다 적발되면 단계적으로 제재를 받는다. 첫 번째는 회원의 배우자를 전기충격실에 처넣고, 두 번째는 본인이 들어간다. 세 번째는 부부가 함께 전기충격을 당하고 네 번째는 자녀를 폭행하며, 아홉 번째 쯤엔 팔을 부러뜨린다. 그래도 계속 피운다면? 그래봤자 금연은 틀림없다. 무덤 속에서야 누가 담배를 피울 수 있겠는가. 이 회사는 같은 방식으로 회원의 출세와 건강까지 관리해준다.(기준 체중을 넘기면 손가락을 절단한다!)

이 소설 속에서 금연주식회사는 전지전능한 존재이다. 회원들의 사소한 일상까지 장악할 수 있는 정보력과 무지막지한 폭력 때문이 아니다. ‘진리’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연주식회사는 회원 개인을 위한 바람직한 일과 바람직하지 않은 일을 당사자보다 훨씬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한다. 그리고 이를 ‘절대 선’으로 강요한다.(이렇게 ‘진리’와 ‘폭력’은 동의어가 된다) 개인들 자신의 욕망과 판단은 대세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필자는 한때 금연주식회사를 기존 공산당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었다. 공산당은 역사의 발전을 책임지는 진리의 담지자로서 ‘인민들에게 진실로 이로운 길’을 당사자들보다 당이 훨씬 잘 인식하고 있다고 선언했었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 개인들 각자의 욕망과 정치·윤리적 판단은 사회·역사 발전의 장애물에 불과하다.
결국 「금연주식회사」의 주제는 개인의 자유를 짓밟는 정치적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스티븐 킹은 단순한 작가가 아니다. 소설 속에서 금연주식회사는 “돈보다 사람들을 돕는데 더 관심이 있고”, 금연을 당한 남자들은 건강과 사회적 출세를 겸하며, 부인들은 행복해 한다. 이렇게 스티븐 킹은 전체와 개인, 그리고 질서와 자유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지만, 사실 누구나 마찬가지다. 당신도 국가/국민, 회사/회사원, 노동자계급/개별 노동자 입장 사이의 조화와 대립 속에서 하루하루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자유’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이다. 근대철학에서 자유는 주로 개별 주체가 이성(세계가 돌아가는 법칙)에 자신을 종속시키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탈근대 철학자들이나 1968년 혁명 이후 ‘진보’사상의 주제는 ‘이성으로부터의 탈주’이다. 탈근대적 흐름 속에서 ‘자유’의 범위는 심지어, 어떤 유명 소설가의 작품명 그대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흡연의 경우처럼)

필자가 해적판으로 읽었던 이 소설이 얼마 전 깔끔하게 번역되어 소개되었다(『스티븐 킹 단편집』- 황금가지). 물론 단편 하나 읽기 위해 소설집을 구입하는 것은 낭비겠지만, 스티븐 킹의 소설들은 최소한의 재미와 함께 가끔 깜짝 놀랄만한 사회적 통찰력까지 제공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