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의 땅' 카자흐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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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의 땅' 카자흐스탄
  • dongpo
  • 승인 2003.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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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27일부터 28일까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고려일보 8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어서 30일부터 이툴동안은 창간8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됐다. 이번 행사 취재를 위해서 기자협회 이상기회장이 이끄는 한국기자상 수상 기자 15명이 방문했다. 그리고 한국언론재단 박기정 이사장과 모스크바 특파원단 6명 그리고 본지 기자 등도 알마티를 방문했다.--편집자

카자흐스탄과 알마티 하면 우리에게 떠오르는 것이 별로 없다. 10만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는 나라라는 인연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따져봤다. ??

카자흐와 한국과의 인연 몇가지

빠리나 런던등 유럽에서 서울에 올 때나 서울에서 유럽으로 갈 때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이 5시간이 넘을 때쯤이다. 전체 여정의 절반을 지날 때다. 이때 비행기 차창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면 보이는 것이 바로 알마아타 부근이다. 알마아타는 그래서 서울에서 유럽을 오가는 사람들에게는 비행기 객실에 설치된  로드맵을 통해 익숙한 이름이다.
고선지라는 고구려시대의 장수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수이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당나라에 거주하는 고구려 교포 1.5세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가 망하자 아버지를 따라 당나라로 건너간 고선지는 당에서 무과에 급제하고 유명한 장수로 성장한다. 그는 740년과 750년 각각 천산산맥 서쪽과 남쪽을 무대로 한 전투에서 공을 세워 출세 가도를 달렸다. 이곳이 지금의 카자흐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80년대초 활동했던 록그룹 송골매의 일원이었던 가수 구창모씨가  90년대 들어 카자흐스탄에 건너가서 현대자동차 딜러로 활동을 했다. 구씨는 그뒤 카지노에 손을 대다가 귀국했다고 동포사회에 전해진다.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실 매점에서 한때 인기를 끌었던 털보네 만두의 민봉식사장이 카자흐스탄에 진출한 것은 91년. 그는 이곳에 진출한 첫 외국인 투자자로 기록된다. 여기서 TV조립공장, 카지노, 가라오케 사업을 했다고 한다.

카자흐 이해의 키워드 언어

이 나라를 이해할 키워드 중 하나는 언어이다. 독자들은 ‘알마 아타’와 ‘알마티’가 같이 사용되고 있는 것에 혼란을 느낄 것이다. 알마 아타는 러시아어이고 알마티는 카작어이다. 러시아어로 알마는 ‘사과' 아타는 ‘아버지'를 뜻하는 말이다. “사과를 재배하는 아저씨가 여기에 살았다"는 뜻이다.
지난 91년 러시아에서 독립이후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독립국가연합 나라들에는 민족주의 바람이 일어났다. 그동안 공용어였던 러시아어 대신에 각민족의 고유언어가 표준어로 대두됐다.
카작어는 우리말과 같은 우랄 알타이어계에 속한다. 이웃 우즈벡어나 키르키어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어계여서 주어 동사등 어순이 같고 문법도 비슷하다. 이곳 대학 한국학과에 재학중인 카작 학생과 고려인 학생중에 카작인들이 언어  습득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한다.
공직 임용시험문제가 카작어로 되어있어 러시아어 능력자들은 시험을 보기도 어렵게 됐다. 그래서 전인구의 절반 가까이 차지했던 러시아인들이 지금은 30% 정도로 줄었다. 연해주로 이주해오는 고려인들도 중앙아시아를 떠나는 주요 이유중 하나로  언어문제를 꼽는다.??

카자흐스탄인 3백만명 인종청소
독일인 1백만명 강제이주

카자흐스탄은 우리 민족 17만명이 연해주지방에서 강제이주당해온 쓰라린 한이 배어있다. 스탈린 시대에 이곳은 어떻게 보면 창살없는 감옥이었다. 반사막이어서 도망갈 수도 없었다. 더욱 심한 것은  강제이주당한 후에도 정치 경제적인 제약이 계속됐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88올림픽 이전까지는 스스로 고려인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의 원주민이랄 수 있는 카작사람들이나 소수민족을 형성했던 독일인은 우리보다 더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카자흐사람들은 인종청소를 당했던 수난을 겪었다. 스탈린 집권 시기인 28년부터 32년사이에 대대적인 집단화 운동이 벌어졌다. 카자흐사람들은 유목민족이기 때문에 정착생활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예외가 도리 수 없었다. 31년에서부터 두해 사이에 카자흐스탄 인구 6백만명 중에서 2백50만명이 집단화과정에서 기아 기근등으로 죽고 50만명이 박해를 피해서 다른 나라로 떠나갔다. 모두 3백만명이 인종청소에 희생된 것이다.  
스탈린은 공동화시피한 이 지역에 타민족을 정착시키기로 했다. 한인들을 이동시킨 다음에 우크라이나의 독일인들과 유태인 체첸 사람들도 이주해왔다. 2차대전이 임박해지자 우리 한인들도 일본스파이라고 강제이주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과의 전쟁이 가까워짐에 따라서 우크라이나나 코카스지방에 거주하던 문제가 될 만한 민족들을 이 지역으로 강제이주시켰다.
91년 독립할 때만해도 카자흐스탄 거주 한인들이 10만명인데 비해 독일인은 100만명이었다. 그런데 한국과 달리 독일정부는 여기서 고국으로 귀국하겠다고 하면 두말없이 받아줬다. 그 결과 지난 10년 동안 85만명이 돌아갔고 이제는 15만명이 남았다. 소리나지 않게 워낙 조용하게 돌아가서 이 사실이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이에 비해 고려인들 10만명중에 일부는 이곳에서 살기 어려워 연해주로 재이주해나갔다. 양국의 동포정책이 선명하게 대비되는 부분이다.
이처럼 여러 민족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유형의 땅 카자흐스탄에도 이제는 희망이 싹트고 있다. 최근들어 석유 우라늄등 풍부한 부존자원을 기반으로 강력한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연평균 경제성장율이 9-10%대에 이르고 있으며 독립국가연합 나라중에서 가장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70여년전의 참혹했던 역사를 뒤로 하고 새로운 희망으로 활기를 찾아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