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와 이용선생의 추억
상태바
'자주'와 이용선생의 추억
  • 김제완
  • 승인 2005.08.1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90년대초 프랑스 유학중에 '자주'라는 이름의 월간잡지를 처음 대했던 기억이 새롭다. 파리의 한 식당에 놓여있던 '자주'는 제호가 또박또박했고 한국사회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주제로 한 글들이 담겨있는 '색깔있는' 잡지였다. 외국에서 펴낸 잡지지만 정확한 한글 맞춤법은 물론 곧은 논조와 결기있는 문체로 유학생들의 관심을 모았다. 신문의 발행지는 스웨덴으로 돼 있었는데 독일등 유럽의 지식인들이 필명으로 기고하고 있었다. 이 잡지는 80년대부터 근 20년 발행되다가 98년 지령 100호를 앞두고 문을 닫았다.

'자주'지의 발행인 이용선생이 38년만에 서울에 온다. 오는 14일부터 나흘동안 서울에서 열리는 `자주 평화통일을 위한 8.15민족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해외대표단 150명과 함께 들어온다. 이중에는 유럽과 일본, 캐나다 지역 입국불허 인사 13명이 포함돼 있다. 그동안 정치적인 이유로 입국하지 못했던 '해외망명객'들중 다수가 국민의 정부 이후 여러 기회에 귀국했지만 아직도 상당수가 남아있었다. 이번 입국은 사실상 최후의 망명객들이 들어오는 것이라고 볼수 있다.

과거에는 국내 관련기관과 소명등 입국절차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으며 들어왔었으나 이제는 815행사의 해외대표로 '당당하게' 들어온다는 점이 다르다.

스웨덴의 이용선생은 미귀국 해외민주인사가 거론될 때마다 명단의 끝에 올라있었지만 한국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기자역시 아직 일면식도 없으나 '자주'지의 독자로서 이 잡지의 발행인을 모른다고 할수는 없을 것이다.

이선생은 최근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자신의 입장을 둘러 가지 않고 똑바로 말을 했다. "나는 억울하지 않다. 국가보안법에서 보면 북의 간첩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나 민족적 입장에서 볼 때는 다르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민족화해이다"

북한에서 태어나 남한으로 내려온 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고 스웨덴에 정착하기까지 그의 인생은 파란과 곡절이 많았던 인생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그만큼 인생의 궤적이 공간적으로 큰 사람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선생은 함경도 북평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함남중학교를 다니다가 1.4후퇴 때 내려왔다. 54년 일본으로 건너간 뒤 와세다 대학 경제학부를 나왔다. 59년부터 민족문제와 관련해서 학생동맹과 청년동맹등에서 일했다. 그뒤 70년에 스웨덴으로 건너갔다. 서울을 방문한지는 일본에 체류했던 67년 마지막 방문한 이래 38년이 됐다.

일본에서 결혼한 그는 장인이 조총련 부의장까지 지낸 거물이었다. 그의 평생 한국대사관에 나온 기관원들에게 감시대상 인물로 지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동안 한국에 거주하는 조카들까지 자신 때문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고 말한다.

지난 90년대에 유럽의 범민련 인사들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으나 북측 당국이 누나와 동생 가족을 만나도록 해주지 않아 북에도 서운함을 버리지 못했다. 남북 양쪽에 실망한 그는 코리안이고 싶지 않다고까지 말한다. 남과 북의 정권에 다같이 치인 해외망명객들이 그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용선생은 현재 스톡홀름에서 70km 떨어진 웁살라에서 거주하며 은퇴연금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