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미-동양화가/ 크로우 동양 미술관 붓글씨 시연
상태바
정영미-동양화가/ 크로우 동양 미술관 붓글씨 시연
  • 달라스 뉴스코리아
  • 승인 2005.05.2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영미-동양화가/ 크로우 동양 미술관 붓글씨 시연
10여년전 신미술대전에서 우수상을 받았던 작품 ‘혼돈’앞에 서있는 정영미 씨. 생명의 잉태, 인간의 발아를 형상화시킨 우수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아시안 페스티발에서 서체를 써주는 작업을 하고 있는 정영미 씨는 기자가 다가와 사진을 찍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자신이 하는 일에 몰두되어 있었다.

지난 14일(토) 달라스 다운타운에서 아시안 페스티발이 열렸다. 공연 및 부스 전시를 통한 한인들의 참여도 있었다.
그 가운데 ‘정영미’란 부스를 설치해놓고 열심히 붓을 놀리며 한자와 한글로 글을 써주는 한인이 있었다. 부스 앞에 몰려선 미국인들과 다른 아시안 커뮤니티 관객들은 그녀가 그려내는 서체의 글자에 매료된 듯 한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종이 위에, 또는 장식용 초 위에 품격 있는 글자를 그려넣어 주고 있었다. 어떻게 그녀가 이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 어떻게 아시안 페스티발에 참여하게 되었나.
달라스 크로우 동양전시관에 개인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었다. 그전부터 가끔씩 초대받아 서체를 그리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을 시연해주곤 했다.
이번에 내 작품들을 크로우 동양전시관에 전시할 수 있는지를 타진하게 위해 찾아갔는데, 책임자를 만나지 못했고 대신 교육 아티스트 담당자가 아시안 페스티발이 있는데 그곳에 전시도 하고 글도 써주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참가하게 되었다.
당일 부스에 내 작품들을 뒤에 걸어놓았는데, 주제는 ‘드림 오브 고구려’로 말 그림 등을 그려놓은 것이다.

▼ 동양화 공부는 어디서 했는지.
1993년에 덕성여대 동양화 학과를 졸업했다. 그 뒤 중국 남경대에 교환학생으로 유학을 가 3년반 동안 공부해 석사를 마쳤다. 한국에 돌아가 듀오 디자인이란 회사에서 택스타일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1년 후 미국에 건너왔다.
미국에 오게 된 동기는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뉴욕에 수출하는 일을 하다보니 영어를 더 배워야겠다는 필요가 생겼다. 미국에 와서 UNT와 브룩헤이븐대에서 영어를 공부하다가, 지난 2001년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현재 3살난 아들이 하나 있다.

▼ 미술상을 수상한 것으로 아는데.
학교에 다니면서 신미술대전 등에 출품해 3년 연속 입상하기까지 했다. 한국화 구상화 작품을 출품해 우수상을 받는 등,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일본 요코하마 자주현 전시회에서 특별상을 받기도 했고, 당시 독립 2주년 기념 중이던 우즈베키스탄 초청으로 한인으로는 최연소 화가로 중앙박물관에서 작품을 전시하는 영광을 안았었다.
덕성여대 학생 중 최초로 중국에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간 것도 미술대전 입상을 인정받은 결과다. 중국에서는 돈황벽화와 실크로드 등을 방문하며 고전적인 것을 찾아 다녔고, 그래서인지 배운 게 많았다.

▼ 배운 것이 많았다면 무엇을 말하는지.
대담성과 자유로움을 배웠다. 한국에서는 철두철미한 테크닉과 붓놀림을 배웠다면 중국에서는 붓의 자유로움을 배울 수 있었다.
고둥학교 때부터 추계예술대 교수인 석철주 동양화가를 스승으로 삼고, 인물화 중심의 동양화를 추구해 왔고, 그 와중에 전서, 예서, 초서, 행서 등 서예를 마스터하게 되었다. 그것을 기반으로 현재는 내 자신의 서체인 벽운체(푸른 벽, 파도 운)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번 아시안 페스티발에서 선보인 것도 그 벽운체다.
고등학교 때에는 취미로 하려고 했고, 동양화에 대해 ‘난이나 치는 정도’로 오해했는데, 알고 보니 전혀 달라서 그 세계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큰 공간에 붓을 던지는 그 모습에 반했고, 평생 이런 작업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여긴 것이다.

▼ 달라스에 와서는 어떻게 작업을 하고 있는지.
결혼, 그리고 아들을 키우는 일로 작업을 전적으로 하지 못하고 있다. 우선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종일 일을 하고 난 뒤에 집에 가면 새벽 1시까지 서너시간 작업을 하고 있다.
남들이 보면 육체적으로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고 하는데, 솔직히 작업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병이 난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나에겐 가장 큰 행복이며 에너지인 셈이다. 현재 집에는 내 작품을 비롯해 작업실을 전시관처럼 꾸미려는 계획을 세우고 노력 중이다. 걸스카우트 등에서 필드트립 코스로 우리 집을 방문하겠다고까지 제의해 올 정도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한인사회와 연결되어 보다 활발한 전시회나 개인 레슨 등을 해볼 생각이다.

▼ 어떤 동양화의 세계를 꿈꾸고 있는지.
화선지와 캔버스를 결합해서 두껍고 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아크릴과 먹을 사용해서 작업하는 것도 좋아한다. 무엇보다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즉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그런 것을 만들어내고 싶다.
그리고 사상이나 철학적으로 더 심오해지고 싶다. 10년전 미술대전에서 상을 받을 때의 작품이 장자의 사상에서 힌트를 얻어 인류의 잉태를 상징하는 ‘혼돈’이라는 작품을 그려냈었다.
지금은 인물화에 주력해서인지, 사람 만나는 것을 즐긴다. 그들 모두가 내 작품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요즘 이해인 수녀의 시를 내 그림에 형상화하는 일이 많은데, 사랑은 나무와 같다는 글귀에서도 참 많은 걸 느꼈다.


정영미 씨는 달라스에 오게 된 이유의 하나가 언니 정경희 씨 때문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정경희 씨는 한인으로서 달라스 오페라에 첫 입성한 메조소프라노였고, 달라스 어린이 합창단에 참여해, 어빙예술 축제 등에 참가했고 지금은 워싱턴에 가있다고 한다
언니와 함께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는 정영미 씨는 달라스에서 자신의 예술 세계가 선보이길 기대하고 있다. 아시안 페스티벌에서 작업에 몰두하던 자신의 모습에 대해 ‘작업에 빠지면 다른 것이 눈에 안들어온다”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고구려 벽화와도 흡사한 그런 느낌이 풍겨왔다.




-이준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