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태조 강헌대왕과 '태조 고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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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태조 강헌대왕과 '태조 고황제'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24.01.2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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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의 묘호와 시호
이형모 발행인
이형모 발행인

중국 묘호의 역사

중국 역대 18개 시대 71개 왕조의 역사에서 왕의 묘호에 ‘조(祖)’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서한을 세운 유방의 묘호를 ‘고조(高祖)’라고 한 것이 처음이다. 그 이전에는 ‘제(帝)’ 또는 ‘왕(王)’을 사용했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진시황이 처음으로 ‘황(皇)’을 사용했다.

서한과 동한 이후 삼국시대에는 모든 왕의 묘호에 ‘제’를 사용했고, 양진시대나, 남북조, 수나라 때까지도 ‘조’가 사용된 예는 없다. 그러다가 당(唐)나라에 와서 ‘당’을 세운 이연에게 ‘고조’라는 묘호를 붙였으며 그 아들 이세민은 ‘태종’이다. 이 때부터 묘호에는 ‘조’와 ‘종’의 개념이 분명해진다.

‘태조’가 처음 나타난 것은 '5대' 시기이므로 기원 907년 무렵이다. 5대 중에 후량과 후주는 건국자를 ‘태조’라 칭했고, 후진과 후한은 ‘고조’라 칭했으며, 후당은 당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두 묘호를 피했다. 따라서 중국 역사에서 건국자를 ‘태조’라고만 칭하기 시작한 것은 송나라(기원 960년)부터이다. 송, 명, 원, 청 등은 건국자를 모두 ‘태조’라고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묘호의 역사

배달의나라(BC3897~BC2333)는 신시에 개천하고 통치한 임금을 환웅이라 불렀다. 18대 환웅이 1,565년간 다스렸다. 배달의나라는 국가 제도를 갖춘 최초의 한민족 국가이다. 

고조선(BC2333년~BC426년)의 단군은 진한, 번한, 마한의 삼한을 통치하는 황제의 칭호였다. 단군 칭호는 단군조선에서 대부여, 북부여까지 2,275년간 존속됐다. 

고구려에서는 왕, 대왕, 태왕을 임금의 칭호로 사용했는데, 기원 53년에 즉위한 제6대 임금은 ‘태조’로 불렸다. 중국의 통일제국 한나라를 기원 105년부터 121년까지 17년 전쟁으로 굴복시키고 고구려 제1차 전성시대를 연 제6대 임금에게 건국자에 버금가는 존호를 드린 것이다. 

조선 중종 조에 이맥이 편찬한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서 “태조의 연호는 ‘융무’이고 시호는 태조무열제”라고 했다.  태조가 기원 53년에 즉위해 146년까지 93년간 재위했으므로, ‘태조’라는 칭호의 기원이 중국보다 약 700~800년 앞서 고구려에서 시작된 것이다.

남북조시대 통일신라는 당나라 연호를 사용한 반면, 발해는 국호를 ‘대진국’으로 하고 황제 대조영의 연호는 ‘천통’이고 묘호는 ‘태조’, 시호는 ‘성무고황제’라 했다. 대조영 황제는 동생 대야발에게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역사를 저술하게 하고, 단군조선의 역사를 백성들에게 가르쳐 한민족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중국 신당서에는 “(당나라) 예종이 (대조영에게) 발해군왕 벼슬을 내리고, ‘홀한주도독’으로 삼았다. 현종 개원 7년 대조영이 죽자 사사로이 고왕(高王)이라고 했다.”고 못마땅해 하는 기록을 남겼다. 침공해온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대진국 황제가 되자, 대조영 황제에게 발해군왕 벼슬을 내린다고 했다.

고려를 창건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의 연호는 ‘천수’이고 묘호는 태조다. 이후 제24대 원종대왕까지는 독자적으로 묘호와 시호를 썼다. 제25대 충렬왕이 원나라의 사위가 되면서 제30대까지 여섯 명의 왕이 묘호를 사용할 수 없었다가 공민왕 때 몽골 세력을 내몰고 자주권을 회복했다.
 

태조 이성계 시호의 변천

이성계는 조선왕조의 창건군주로 묘호는 태조(太祖), 성은 이(李), 초명은 성계(成桂), 즉위 후 개명한 이름은 단(旦)이다. 살아있는 왕의 이름은 누구도 부를 수 없다. 왕이 붕어하면 생전의 치세와 공적을 함축하는 묘호와 시호를 드려 공식 칭호를 삼는다.

첫 번째, 유교의 예법 상 조선의 국왕은 황제가 아니므로 묘호를 쓸 수 없었고, 명나라가 ‘강헌’이라는 시호를 보내와서 대표 시호로 삼아 “강헌대왕‘이라고 칭했다. 

두 번째, 그러나 조선은 스스로를 명나라의 제후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창건군주의 묘호를 ‘태조’로 하고 명나라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조선이 정한 존호는 ‘태조 강헌대왕’으로 조선왕조실록 태조편 제목도 <태조 강헌대왕 실록>이다. 조선 조정은 시호로 ‘지인 계운 성문 신무’를 바쳤다. 그래서 이성계의 공식 존호는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대왕’(14자)으로 칭했다. 

세 번째, 숙종 9년(1683년)에는 ‘정의 광덕’을 추증해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정의 광덕대왕’(18자)이 됐다.

네 번째, 1872년 조선 건국으로부터 8주갑(480년)이 되는 해에 고종은 태조에게 조선을 창건한 공덕을 보답하는 ‘응천 조통 광훈 영명’의 시호를 바쳤다.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응천 조통 광훈 영명 성문 신무 정의 광덕대왕”(26자)이 됐다.
 

‘태조 강헌대왕’에서 ‘태조 고황제(高皇帝)로 

다섯 번째, 1897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태조 강헌대왕’을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고 명나라로부터 받은 시호 ’강헌‘을 폐했다. 이로부터 함흥 본궁의 위패는 ’태조 고황제‘라고 고쳐 썼다. 이로써 태조의 공식 존호는 “태조 지인 계운 응천 조통 광훈 영명 성문 신무 정의 광덕 고황제”(25자)가 됐다.

 1800년 정조대왕의 붕어이후, 순조, 헌종, 철종이 다스린 63년 동안 세도정치로 피폐해진 나라를 물려받은 고종은 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한 개혁을 시작했다. 또한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물결에 편승해 조선을 속국화 하려는 중국과 일본제국의 공세에 대응하고자, 조선을 두 나라와 대등한 대한제국으로 격상하는 결단을 실천했다. 

1392년 조선을 창건한 ‘태조 강헌대왕’은 505년 세월이 지난 대한제국에서 명나라에게 감췄던 묘호 ‘태조’를 드러내고, 명나라가 준 시호 ‘강헌’을 폐하고 대한제국의 ‘태조 고황제’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