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다시 본다] Ⅲ-3. 움트는 동포기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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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다시 본다] Ⅲ-3. 움트는 동포기업들
  • 경향신문
  • 승인 2005.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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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5-03-02 20:00]     
 

지난 2월2일 도쿄 최대의 전자거리인 아키하바라에는 매우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외국인에 대한 텃세가 심한 아키하라바에 한국의 젊은 기업인이 대형 가전 매장을 열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주)에이산(永山)의 장영식 회장(37). 2003년 12월 첫 매장에 이어 아키하바라에만 벌써 두번째 매장이다. 아키하바라에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이 매장을 가진 것은 장회장이 유일하다. 1994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온 뒤 10년 만에 일궈낸 재팬드림이었다.

계기는 워크맨이었다. 아키하바라에서 워크맨을 사려다 매장마다 값이 다른 것에 흥미를 느껴 일본 유통시장에 발을 디뎠다. 낮에는 어학 공부, 밤에는 야키니쿠(불고기)가게 아르바이트. 창업 초기 자본 부족으로 리어카를 빌려 배달하기도 했다. 신용을 무기로 일본 대기업들로부터 물품을 납품받았다. 동시에 신제품 마케팅의 중요성에 눈을 뜨면서 일본의 카 오디오업체인 켄우드와 자동차용 MP3를 공동 개발, 판매한 것이 빅 히트를 기록했다. 켄우드와의 MP3 합작품은 유통업의 마케팅 투자가 제조업의 연구·개발(R&D)에 해당하는 중요 열쇠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지난해 에이산의 매출은 본사와 자회사인 통신판매 부문을 합쳐 78억엔. 올해 목표는 1백억엔이다. 2~3년내 상장을 통해 시장 자본을 확보하면 북한에 가전 공장을 세워 일본에서 판매하겠다는 희망도 갖고 있다.

한국의 젊은 기업인들이 일본의 주류 사회로 속속 진출하고 있다. 주역들은 이른바 ‘뉴커머(New Comer)’로 불리는 재일 한국인이다. 뉴커머는 일제 식민지시절 일본에 건너온 전통적인 재일교포 세대인 올드커머(Old Comer)와 달리 1965년 한·일협정 이후 유학, 파견근무 등으로 일본에 건너온 뒤 정착한 이들이다. 이들의 도일은 특히 1980년대 말과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이후인 1990년대 초 집중됐다.


현재 뉴커머로 불리는 이들은 대략 15만명이다. 60여만명으로 추산되는 재일교포 전체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과거 역사적 혼란기 상황에서 정착한 올드커머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지난한 세월을 보냈던 것과는 달리 이들은 한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일본 사회에서도 당당히 ‘재일 코리안’임을 주장한다. 비즈니스에 대한 욕구도 충만해 진출 업종 역시 빠찡꼬, 요식업에 집중돼 있는 기존 동포들과 달리 전방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국제익스프레스의 나승도 사장(44). 구멍가게 수준의 이삿짐 센터에서 한·일 국제물류의 대표 기업인으로 떠오른 인물이다. 일본에 건너온 것은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인 89년. 아르바이트를 통해 번 3백만엔으로 유학생·주재원 대상의 이삿짐센터를 시작했다. 무기는 형식 파괴. 출범 초기부터 박스 크기를 대·중·소 형식으로 구분한 요금시스템을 도입해 경쟁자들을 놀라게 했다. 같은 화물 규모라도 부르는 값이 제각각인 운송비용에 의구심을 가졌던 고객들을 파고들었다. 규모가 커지면서 국제 물류를 본격화했고 이 과정에서 ‘혼재화물 취급’이라는 또다른 시스템을 통해 운송비를 기존 값의 절반 이하로 낮추면서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어갔다.

혼재화물 취급은 컨테이너 하나에 종류가 다른 물건을 섞어 운송하는 방식. 하나의 컨테이너에 종류가 같은 물건만 싣는다는 기존 관념을 깬 것이다.


정보기술(IT) 부문의 진출은 더욱 두드러진다.

재일동포 3세인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의 명성을 잇고 있는 전희배 사장(50). 40대 중반이던 2001년 1월 그는 ‘키스코’라는 이름으로 일본 시장에 도전장을 냈다. 사업내용은 소프트웨어 개발. 역사는 짧지만 도시바 정보시스템, 후지제록스 정보시스템, 산요 텔레커뮤니케이션스 등 거래 기업은 쟁쟁하다. 최근에는 NHK의 문자방송 시스템과 미에현에 있는 후지쓰 반도체 공장의 생산 공정 자동제어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수주받아 업계를 놀라게 했다. 현재 종업원은 100여명. 전 사장은 “일본의 진입장벽이 높긴 하지만 기술력으로 다가가면 불가능은 없다”고 말했다.

영상물 송신 솔루션 벤처인 월드윈네트의 이성범 사장(40)도 최근 들어 일본 언론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급성장하고 있는 한국 벤처인이다. 전남대 일본어과를 나온 뒤 91년 도일, 컴퓨터를 배워 99년 창업했다. 최근에는 NTT와 함께 일본 최대의 호텔 체인인 프린스호텔 등 주요 호텔에 인터넷을 통한 동영상 서비스를 시작했다. 종업원 10명에 연매출만 10억엔으로 1인당 매출 1억엔이라는 경이로운 실적을 올리고 있다. 이사장의 무기는 철저한 현지화.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일본의 문화·습관을 철저히 익히고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워야 한다는 게 지론이다. 이에 따라 일본 기업경영자들의 모임인 ‘재계인’에도 참여하는 등 주류 사회에 깊이 파고들었다. 바닥에는 물론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이 깊게 깔려있다.

이밖에 건강약품으로 일본 사회를 파고드는 박충길 사장, 자동차 부품 등의 무역으로 일본 사회 저변을 확대하고 있는 테크노피아 박재세 사장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뉴커머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 중앙언론사의 한 경제부 기자는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저돌성으로 무장한 뉴커머들은 일본 사회에서도 주목 대상”이라며 “이들은 단순한 기업활동에 국한하지 않고 최근 한류붐과 맞물리면서 양국 교류의 접목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도쿄|박용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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