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재외동포기자상 기획보도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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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재외동포기자상 기획보도부문
  • 박신규
  • 승인 2005.03.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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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시카고 한인 이민사 -② 한인사회의 태동

◇전쟁과 이민 침체기 1940~50년대=1930년대에 서서히 자란 시카고 한인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면서 다시 침체하게 됐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에서 새 유학생이 전혀 안 온 데다가 가족을 가진 사람들은 재미 일본인들이 집단 수용소로 가면서 남긴 일자리를 얻어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 시카고 이주 한인 100주년 기념 사진전 당시 한인감리교회 6대 담임이었던 이은택 목사에 따르면 “2차대전중에 학생들이 모두 통역병으로 뽑혀 갔기 때문에 80여명의 교인중 10명도 채 안되는 숫자가 예배를 드리는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2차대전때 일본인 배척 때문에 동양인들이 모조리 수난을 당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유없이 백인들에게 매를 맞고 상점 주인들은 한인들의 출입을 금하기도 했다. 1942년 외국인 자산 동결령으로 한인들은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됐으며 일본인들을 오하이오주 집단 수용소로 보낼 때 한인들이 오해를 받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당시 한인들은 일본인으로 오해받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나는 한인이다(I am a Korean)’라는 표식을 달고 다니면서 일본인으로 봉변당하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 1945년 이전 시카고 한인들은 영주권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어 신분이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민국 수사관들이 수시로 불심검문을 갖고 문제 한인들을 연행해 갔으며 불법체류자로 적발되면 무조건 강제송환시키는 상황이었다. 일부 한인들은 생활고와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했다. 1950년 6·25 한국전 발발은 시카고에도 큰 충격을 가져왔다. 전쟁소식이 신문과 방송으로 전해지자 전 지역의 시카고 한인들이 예배당에 가득 모여서 조국을 염려하는 눈물의 기도를 하며 한편으로는 통일이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그 방안을 토론했다. 그리고 피난민들을 위해 전쟁 구호품을 모아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본국에 전달하는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대부분의 한인들과 유학생들은 가족 생활이 어렵고 거의 고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인 친구나 다른교회를 통해 간접적으로 구호품을 수집해 보내는 상황이었다. 그로부터 4년후인 1954년 한인 학생회 주최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 많은 한인들이 모였는데 당시 시카고 인근 유학생수가 모두 약 2백명이 된다고 학생회측은 기록했다. ▲ 시카고 한인사회 발전 포럼
◇시카고 한인회 출범과 1960년대 한인사회=1960년대 들어서 한인감리교회 산하조직으로 활동하던 시카고 한인학생회가 독립적인 단체로 주체성을 찾기 시작하다가 한인회로 변신하여 독립해 나갔다. 당시 학생회 회장이었던 심기영씨는 학생회와 감리교회는 40년간 운명을 같이해 온 밀접한 관계이지만 학생회는 독립단체임이 헌장에 명시돼 있는 만큼 교회와의 관계를 선명하게 정립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이와 함께 당시 주요행사를 할 때나 대외관계에서 과거의 이승만박사 지지측과 그에 반대하는 측이 갈등을 겪는 등 한인사회의 분파요소를 통합할 목적과 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시카고 한인들을 대외적으로 대표하기 위해 시카고 한인회가 마침내 발족했다.

1963년 1월3일 한인감리교회에서 한인회 창립총회를 갖고 최다수 득점자인 손원태 박사를 초대 이사장에 선출하고 초대회장에는 정보라 박사를 선출했다. 이어 1964년 1월에는 제2대 시카고 한인회장으로 김봉오 박사를 선출했으며 1965년에는 다시 정보라 박사가 한인회장을 맡아 초창기 한인회 창립기를 주도해 나갔다.

초대 한인회장 정보라 박사는 1963년 시카고 네이비 피어에서 열린 ‘국제 민속제’(International Folk Festival)에 처음으로 참가해 대외적으로 한인회가 시카고 한인사회 대표적인 단체라는 상징적 행사를 했다. 그후 1970년대까지 한인회는 이 국제 민속제에 참가해 한국의 민속품을 전시하고 불고기와 만두등 한국음식을 판매하고 고유무용을 선보이는등 주류사회를 향해 한국을 알리는 주요한 역할을 하게됐다.

▲ 시카고 동포사회 대표적인 코리안 페스티발인 한인거리축제. 올해로 10회째를 맞는 이 축제에는 매년 1만명이상의 외국인과 동포들이 참가하며 한국 전통문화와 먹거리가 소개되고 있다. 이 민속제는 1980년대에 제인버언 시장이 음식축제 ‘테이스트 오브 시카고’(Taste of Chicago)로 변경함으로써 한인회의 참여가 중단됐다. 한편 1964년에는 감리교회내 장로교인들을 주축으로 시카고 두 번째 한인교회가 세워졌다. 당시 기록에 보면 감리교회내 주요인물이었던 김봉오 직원회장, 직원회 서기 장시근, 부인회장 애나 하, 청장년 회장겸 성가대장 이경화, 재정, 탁사위원 유기진등이 이종욱 목사와 함께 분리하여 1964년 4월5일 시카고 한인장로교회를 창립한 것으로 전해졌다. 1960년대 중반부터 시카고 한인교회들이 급증하기 시작했으며 1966년말 발간된 시카고 한인회 주소록에는 5개의 한인교회(한인감리교회(은준관목사), 한인장로교회(임옥목사), 한인그리스도의교회(김윤국목사), 한인복음교회(방지형목사), 부에나 기념장로교회한인회중(이영재목사))와 1개의 선교센터(한인선교전도센터(강 스테판목사))등 총6개의 기독단체가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후 5년이 지나서 1971년 5월에 발행된 시카고 한인회 주소록에는 교회 및 선교센터가 15개로 증가했다. 1965년 동양인들의 이민이 허용되고 이미 입국해 있던 사람도 자격이 갖춰지면 영주할 권리를 부여한다는 내용의 개정 이민법이 전격 시행되면서 한인사회가 비약적인 발전을 맞게 됐다. 1960년대 연방 인구조사에는 시카고 한인수가 297명으로 집계됐는데 1970년도에는 1,666명으로 집계됐다는 점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특히 당시 인구조사에 응하지 않은 유동인구 유학생들을 합치면 70년도의 시카고 한인인구는 인구보고서의 숫자보다 2~3배이상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이민보다도 유학생 숫자가 급증했는데 그 이유는 1961년이후 한국정부가 유학을 개방하여 문교부 시험을 거친 학생들이 대거 미국유학을 오게 된 것이 주 원인이었다. 또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한국에서 의사, 간호사 자격증을 가진 의료직 전문요원들이 1965년 이후 대거 미국에 고용이주함으로써 시카고 한인사회에 경제적으로 안정된 봉급자 계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65년이후 대량 이주한 한인들의 정착형태의 특징은 지리적으로 주거지는 분산되면서 사회적으로는 한인교회와 한인단체들을 중심으로 강한 유대를 형성해 왔다는 것이다. 주거지가 분산된 요인으로는 유학생들이 캠퍼스 주변으로, 의료 전문인들은 병원시설부근 또는 병원측이 제공하는 숙소로 거주지를 정하는 한편 그 외의 이민자들은 아파트 임대료가 낮은 근로층 주택지 또는 정부 조보금으로 운영되는 고층 공영 주택단지에 입주했기 때문이다. 정착초기 수년후 근로층 주택가나 공영 아파트의 환경과 부근 공립하교의 상태가 퇴락함에 따라 대부분의 한인들은 환경과 학교가 더 좋은 백인지역으로 이주해 나갔고 동족간의 인접 거주문제를 염두해 두지않은 대신 교회등을 통한 주말의 사회적 유대로 대치했기 때문에 지리적 한인 ‘게토’보다는 주말의 사회적 ‘게토’형성으로 더 강하게 진행되는 현상을 나타냈다. ▲ 박신규 기자
시카고=박신규기자  skpark@koreadail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