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5월 14일 조명하 의사와 일본 육군대장 구니노미아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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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5월 14일 조명하 의사와 일본 육군대장 구니노미아의 만남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5.11.2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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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상호 대만 슈핑과기대 중문과 교수

대만 한인사회가 87년 전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 조명하(1905∼1928년) 의사를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중심에는 김상호(54) 대만 슈핑(修平)과기대 중문과 교수가 있다. 그를 지난 18일 오후(현지시간) 타이베이(臺北) 선월드 다이너스티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조명하 의사와 구니노미야 구니히코(久邇宮邦彦,1873-1929)는 전혀 일면식도 없었습니다. 다만 당시 나라 잃은 설움 속에 살다가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조국을 위해 구니노미아를 척살하고 순국하신 조 의사와 식민통치자의 신분으로 중국의 전진기지였던 대만을 순시하러 온 일본 육군대장과의 잠깐 스쳐가는 만남이었을 뿐이지요. 조명하 의사는 지금부터 87년 전인 1928년 5월14일 쇼와(昭和) 텐노(天皇)의 장인이며 육군대장이었던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1873-1929)를 대만의 중부도시 타이중(臺中, 自由路2段2號,)에서 독을 바른 단도로 척살했지요.”

▲ 조명하 의사
 “거사 당일 조명하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돼 그 해 10월 10일 오전 10시12분 대한 남아의 당당하신 기개와 불굴의 정신으로 가슴에는 152호의 죄수번호를 달고 타이베이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하셨고, 구니노미아는 그로부터 8개월 후 일본이 말하는 급성내장염(즉 의사의 진단으로는 복막염으로 독이 퍼진 것이 원인)으로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정부에 커다란 충격을 줬을 뿐 아니라 중국이나 특히 대만인들에게 항일투쟁에 있어 하나의 지표를 제시하며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당시 대만 총독이 사표를 냈고, 총독 이하 각 국장들도 파면되는 등 대대적인 인사가 단행되었다. 일본 식민지 통치자들은 이 사건에 대한 언론통제를 한 달간이나 지속했고, 일본 수상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까지 나서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며, 서둘러 진상을 조사하겠다며 진화에 나섰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당시 조명하 의사의 타이중 의거에 대해 수많은 대만인들도 기뻐하며 환영하는 분위기를 보였다는 점이다.

▲ 구니노미야 일본 육군대장
 특히 당시 같은 정치범의 신분으로 타이베이 형무소에 조명하 의사와 함께 수감돼 있던 왕스랑(王詩琅(1908-1984, 대만 작가로 1927년 ‘대만흑색청년연맹 사건’으로 1년 반 투옥됨)은 훗날 의사님 연구에 관해서 한국 내 최고권위자의 한 분이신 숙명여대 조경래 교수의 방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와 함께 수감되었던 많은 사람들은 조명하 의거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가 사형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일제의 만행에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만에서 대만인이 해야할 일을 뜻밖에도 조선인인 조 의사가 와서 하셨습니다. 이점에 관해서는 비록 우리 대만인이 하지 못해 창피함을 느낍니다만 우리 모두는 그분을 칭찬하며 기뻐했습니다. 다시 말해 정말이지 용감하고 통쾌했던 큰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휘진파(許進發)라는 대만학자는 <대만역사사전> (台北,遠流出版社,2004년 5월 출판)에서 일명 ‘조명하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인 조명하는 1923년 조선공립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에 종사하다가 나중에 군청의 임시고용원으로 일했다. 월급이 적어 사직한 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노동을 하며, 상공전수학교 야간부를 다녔다. 그러나 수입에 한계가 있을 때 대만 경기가 양호하다는 얘기를 듣고 일본 센다이 사람으로 가장해 바다 건너 대만에 와서 일했다. 조명하는 1927년 1월 타이중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차 상점에서 일했지만, 대우도 안 좋고 앞날도 비관적인 생각이 들어 1928년 5월 14일 자살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대해 휘진파 교수는 1938년 4월 일본학자 와시노스 아츠야(鷲巢敦哉)가 출판한 <대만경찰40년사화台灣警察四十年史話>를 참고서적으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지요. 대만 타이중에서 거사를 일으킨 의사에 대해 대만역사학계는 아무런 고증없이 당시 일본의 자료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실을 왜곡하는 역사적 우(愚)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 의사는 어떤 인물일까?’, ‘왜 그는 본국에서도 대만에서도 잊혔을까?’, ‘지금, 왜 김교수는 조 의사를 되살리겠다는 것일까?’

 김 교수는 조 의사를 처음 알게 된 사연부터 차근차근 풀어냈다. 2004년 대만국립대에서 열린 한 학술회의에 참가했다가 우연히 대만일보 편집국장을 만났고, 술을 한잔하면서 그로부터 '조명하'의 존재를 파악했던 것.

 “그가 조 의사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제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어떻게 한국인이 조 의사를 모를 수 있느냐'는 눈으로 저를 쳐다보더군요.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지요.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부끄러움도 잠시, 김 교수는 곧바로 조 의사를 연구하지 못했다. 다시 잊고 지낸 것이다. 그러다 2006년 다른 논문을 쓰려고 '대만역사사전'을 들춰보다가 '조명하 사건'(1,184∼1,185쪽)이라고 설명한 부분을 발견하면서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사실과 완전히 다르게 기술돼 있는 겁니다. 어이가 없었죠. 그래서 이를 뒤집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특별히 할 일이 없더라고요. 단지 부임하는 주타이베이 대한민국 대표부의 외교관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학술적으로 조명하자고 제안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시간만 흐른 것이죠.”

 김 교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판단 하에 2011년6월28일 대만 文化大學 국제학술회의에서 조명하 의사와 관련된 논문을 중국어로 발표했을 당시 그 자리에 토론자로 나온 대만 문화대학 역사학과 조우졘(周健) 교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당시 2004년 출판된 대만역사사전은 일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국민당정권을 부정했던 역사학자들이 기술한 것으로 당시 일본자료를 그대로 기술한 것입니다. 고증을 거치지 않은 점, 같은 대만의 역사학자로서 미안할 따름입니다.”

 이처럼 조명하 의사의 의거는 일제강점기 철저한 언론 통제 속에 영향을 받은 대만 역사학자들에게도 거침없이 받아들여져 왜곡되고 폄훼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역사 속에 묻히는 것이죠. 더 가슴 아픈 일은 현재 대만의 관련 서적이나 인터넷에도 거의 유사한 기록들이 계속 퍼져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더욱 황당하게 여긴 것은 대만 역사학자들이 일본 자료를 베낀 것에 대해 "미안하다"라며 가볍게 넘기려는 분위기였다.

 그나마 주타이베이 대표부가 늦게나마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조백상 대표는 오는 12월 17일 타이베이에서 열리는 '제2회 한국•대만 인문학 학술대회'에서 비록 여러 주제 가운데 하나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조 의사를 조명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발표는 김 교수에게 의뢰했다.

 지난 14∼17일 이화여대, 서경대 등 학생을 비롯한 한국의 대학생 22명, 호주에 거주하는 조 의사의 장손 조경환 씨, 남기형 조명하의사기념사업회 회장, 김주용 독립기념관 연구사 등 29명의 방문단이 '조명하 독립을 외치다 탐방단'이라는 이름으로 조 의사의 거사 현장 등을 다녀가면서 재조명의 불을 댕겼습니다. 조 의사 순국 90주년이 되는 2018년까지 계속 분위기를 조성해 역사 속에 묻힌 조명하를 살려낼 것입니다. 그 전에 학술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김 교수는 내년에 대만의 역사학자를 초청해 '조명하 의사'만을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할 계획이다.

 "제임스 볼드윈의 말대로 사실 역사가 강력한 힘을 갖는 까닭은 '우리 안에 역사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말 그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지요."

 "얼마 전 '조명하 독립을 외치다 탐방단' 이 대만에 올 무렵 조명하 의사의 유복자이신 조혁래 옹(90)으로부터 이메일을 받고, 저는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만 역사학계에 왜곡되고 폄훼된 내용을 반드시 바로 잡겠다고 했습니다. 누군가는 해야할 일인데 마침 제가 대만에 살고 있으니 그저 저의 업보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지요."

 [재외동포신문 이형모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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