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인도차이나의 작은 나라, 캄보디아는 당대 초강대국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다. 프랑스총독부는 물론이고 본국정부도 이 젊은이가 저지른 범죄내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입장에선 자신들이 식민통치하던 나라에서 흔히 일어나는 범죄 중 하나였다.
유적 발굴이란 명분아래 정부차원에서 묵인하거나 자행된 도굴도 흔하던 시절이라 프랑스 당국 입장에서도 대충 눈감아줄 수 있는 그런 사안이었다. 그러나 당시 캄보디아 왕실은 '반테이 스레이'라 불리는 사원에서 발생한 이 사건만큼은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더욱이 이 젊은이가 도굴을 시도한 유물은 단순한 유물 이상의 가치를 갖는 문화재급 보물이었다.
비록 지옥 같은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당시 그는 프랑스정부에 많이 서운했던 것 같다. 수년 후 그는 자신의 천부적인 문학적인 재능을 되살려, 당시 유물을 도굴하는 과정에서 직접 겪은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담은 자전적인 소설을 출간한다. 그 책은 다름 아닌 <왕도로 가는 길>(La Voie royale, 1930)이다. 그리고 그 책을 쓴 저자는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말로'(André-Georges Malraux)다.
<인간의 조건>(1933)이라는 작품으로 프랑스 콩쿠르 문학상을 수상한 당대 최고의 작가인 그는 22살 젊은 나이에 인도차이나 반도 고고학 조사단 일원으로, 라오스를 거쳐 캄보디아에 첫발을 딛게 된다. 세계적인 작가로서 반열에 오르기 훨씬 이전이었다. 동양어학교를 졸업해 동양미술에 관심이 많던 그는 조사단에서 따로 나와 캄보디아 내 수많은 조각상을 도굴, 프랑스 본국으로 가져가는 사업을 시작했다.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이런 도굴범죄에 단순한 발견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았고,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당시만해도 식민국가들을 상대로 한 프랑스와 영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무차별적인 도굴이 워낙 공공연하게 일어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는 그 당시 젊은 시절, 일생일대 단 한 번의 실수 때문에 프랑스를 대표하는 '대문호'라는 타이틀 말고도, 크메르유적 도굴범이었다는 멍에를 쓴 뒤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현지 유적가이드들의 설명에도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심지어 위키피디아 인물사전을 비롯해, 그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곳에는 과거 도굴사건에 관련된 기록과 내용이 빠짐없이 들어가 있다.
물론, 그동안 해외에 밀반출된 문화재급 크메르유물을 되찾기 위한 캄보디아 정부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캄보디아가 수십 년 동안 장기 내전에 휩싸이면서 다시 돌아온 유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도굴범들에 의해 밀반입되었을 것으로 거의 확실히 되는 유물들조차도 미국 소더비나 영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공공연하게 거래가 이뤄질 정도다. 일부 문화재급 유물들의 경우는 캄보디아 정부가 직접 반환을 위해 법적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에 밀반출되었던 크메르 유물들의 반환이 성사되기 시작했다. 캄보디아 정부의 끈질긴 환수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거둔 것이다. 영국 크리스티 경매와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등도 그동안 보관 전시 중이던 유물들을 지난 5월 캄보디아에 돌려주었다.
앙코르유적 내 중형버스 출입 금지한 이유
캄보디아인들도 조상들이 만든 문화재유물에 대해 큰 애정과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입장수입을 올리는 데만 혈안이 되었던 캄보디아인들 스스로가 유적보호에 차츰 관심을 보이며, 앙코르 유적복원과 관리에 보다 많은 관심을 열정을 쏟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캄보디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관광객들이 늘면서 유적 훼손 등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한해 캄보디아를 찾는 해외관광객수는 매년 400만 명을 넘어선 상태다. 하루에도 수만 명의 관광객들이 앙코르와트를 찾다보니 앙코르유적의 훼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앙코르유적을 보전 관리하는 압사라 당국(Apsara Authorities)이 유적지 내에서 관광객들을 싣고 운행하던 35인승 중형버스의 출입을 전면 금지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최대한 줄여 사암으로 만든 유적의 부식을 막기 위함이다.
지금은 작은 승용차량이나 '툭툭'이라 불리는 3륜 오토바이택시만 간신히 '앙코르 톰' 남문이라 불리는 성문입구를 통과할 수 있다. 최근엔 중국에서 전기차가 도입되어, 소음도 적은 이 차를 타고 유적지를 들러보는 관광객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인근 씨엡립 국제공항의 이전 계획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점보제트기의 잦은 이착륙에 따른 진동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사암으로 쌓은 유적지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유네스코와 유적보존관리당국의 지적 때문이다. 지금도 앙코르유적에 가면 유적보호 및 관리를 위해 압사라당국에서 나온 관리직원들과 관광경찰들의 모습을 언제나 볼 수 있다. 이들이 이곳에 나와 있는 이유는 입장권 검사뿐 아니라 도굴하거나 유적에 낙서를 하는 등 훼손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현지 당국과 경찰도 당황시킨 황당한 사건
앙코르 유적 중 '앙코르 톰(Angkor Thom)'이라 불리는 성곽 주출입문 중 하나인 남문을 건너는 다리에 걸쳐진 석상의 머리 하나가 한 관광객의 실수로 떨어진 것이다. 이 다리난간에 놓인 석상들은 대략 12세기께 사암으로 완성된 것으로, 수 백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대표적인 문화재급 유물이다.
그런데 이런 큰 실수를 저지른 관광객은 공교롭게도 한국인 대학생이었다. 현지 신문 대부분은 사건 다음날인 8월 13일 오전 이 학생의 이름까지 실명으로 거론하며 이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심지어 이웃나라인 태국과 베트남에도 사건이 전해졌다. 인도차이나반도 전역에 거의 다 알려진 셈이다.
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 대학생이 밀어 떨어뜨린 석상 머리는 원래 것이 아닌 시멘트로 만든 모조품이었다. 약 2.5m 가량 되는 거대한 석상에서 떨어진 머리가 진품이었다면, 분명 초대형사건이 됐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소식을 접한 한국 교민사회는 "젊은 대학생이 나라 망신시켰다"며 몹시 흥분했다. 인도차이나 문제를 연구하는 인터넷 사이트 <크메르의 세계>에도 대학생의 철부지 행동을 비난하는 댓글이 여러 개 달렸다. 교민들이 주도 애용하는 페이스북 등 SNS도 이 문제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심지어 일부 교민들 중에는 "이 대학생이 소속된 봉사단체가 기독교단체이기 때문에 혹시나 의도적으로 힌두석상을 훼손시킨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기자가 사건발생 이틀 후 현장을 찾아가 확인해본 결과, 악의를 가지고 석상의 머리를 떨어뜨렸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우선, 그런 일을 고의적 시도했다고 보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더욱이 이 학생은 석상이 떨어지는 과정에 피하지 못해 발목을 다쳤다. 다만, 대학생과 현지 신문 등이 밝힌 내용처럼 단순히 기념사진촬영을 하기 위해 살짝 밀었다고는 보기 힘들만큼 석상 머리는 무거웠다. 때문에 사진촬영을 위해 석상 머리 쪽에 기대거나 석상 목에 과도하게 매달리는 과정에서 체중이 실려 몸체 위에 얹은 석상 머리가 떨어진 것으로 보였다.
"유적지에서 공공연하게 찬송가... 꼴불견이다"
"설사 그 학생이 사진촬영하려다 실수로 그렇다손 치더라도, 만약에 자신이 믿는 종교의 십자가상이나 기독성지의 유물이었다면, 아무리 기념사진 촬영이라도 그렇게 함부로 목에 매달리거나 무리하게 몸으로 밀칠 수 있었겠느냐? 이는 다른 종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나 존경심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 부끄러운 사건이다"라고 힐난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교민사회에서는 기독교봉사단체들이 그간 유적지에 벌인 잘못된 처신과 행동에 대한 비난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일부 교민들은 사건자체보다는 사건을 일으킨 학생이 기독교봉사단체 소속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 "유적지에서 공공연히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는 모습도 꼴불견"이라고 일침을 놨다.
반면 일부 교민들은 "이번 사건이 더 이상 크게 확대되지 않아 천만다행이다"라고 입을 모았다.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