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 대한 어떤 기억
상태바
우리말에 대한 어떤 기억
  • 조남철
  • 승인 2008.06.18 17:41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조남철(한국방송통신대 교수, 본지 편집위원장)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는 일이 직업이다 보니 우리말과 글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가지게 된다.

우리말과 글이 우리들이 서로가 하나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도와주고 또 처음 보는 사람들도 하나의 핏줄로 묶어주는 정서와 소통의 주요한 도구라는 사실을 새삼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낯선 나라에서 우리말을 쓰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그 감동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과 관련해 다소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러시아의 고려인 동포와 관련된 경험이다. 2,3년 전 관계하고 있는 시민단체에서 러시아의 우수리스크에 한글학교를 세우기 위해 후원회를 결성하고,‘후원회 밤’에 우수리스크의 실행위원장인 러시아인 동포를 초청하였다.

의례적인 몇 가지 행사가 끝나고 실행위원장인 동포 여성이 인사말을 하였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한 강제이주’로 다른 지역의 동포들에 비해 우리말을 잘 하지 못하는 고려인 실행위원장은 원고지를 써 와 떠듬거리며 인사를 했다.

장내에 모든 이들이 고려인 동포 여성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떠듬거리기는 했지만 진심이 담긴 그 말은 그 자리에 같이 한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말이 더 이어졌다.‘정말 미안합니다. 같은 민족인데도 우리말을 잘 하지 못해 이렇게 글을 써 와 읽고 있는 사실이 너무 미안합니다.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을 때에는 유창하지는 못해도 원고를 보지 않고 말 할 수 있도록 우리말을 열심히 배울 것을 여러분에게 약속드립니다’. 순간 나는 너무 엄청난 충격에 쌓였다. 누가,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들 중 누가 그 러시아 동포에게 우리말을 하지 못한다고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몇 십 년 동안 낯 선 남의 땅에서 온갖 시련과 고통을 혼자 견디어 내야 했던, 나라도 겨레도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이제야 겨우 우리 곁에 함께 선 이 누이와 핏줄들에게 누가 우리말을 모른다고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 동포의 너무나 순박한 모습에 가슴이 저려 왔다.

다른 한 기억은 중국에 있는 어느 동포 대학에서의 경험이다. 그 동안 이런 저런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모아 동포 학생들에게 아주 적은 금액의 장학금을 지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얼마 전 그 장학금 전달식에서의 기억이다. 전달식이라고 해야 한국에서 문학기행을 같이 간 대학생 40여명에게‘민족’을 느끼게 할 생각으로 급조된 의식이어서 한국 학생들 이외에는 조선족 동포와 대학교의 중국인 관계자, 그리고 장학금을 받는 동포 학생들이 전부였다. 조촐하게 식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같이 한 한국인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일이 생겼다. 식을 모두 중국어로 진행하는 바람에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한국 학생들은 멍하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족’을 느끼게 하기 위한 행사가 오히려 이질감을 더 분명하고 크게 드러낸 것이다.

학생들을 이끌고 그 자리에 참석한 글쓴이도 크게 당황하였고, 순간 크게 불쾌했다. 행사 후 그들에게 불만을 표시하였고, 그들 역시 미안하다는 뜻을 표현하기는 했지만, 꽤 오랫동안 불쾌한 감정을 버리기 어려웠다. 그것은 분명 우리말을 모욕한 일이었고, 말을 모욕하는 일은 민족을 모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과 글은 민족을 하나로 엮는 가장 큰 얼개이다. 당연히 세계화 시대 700만 동포를 하나로 묶는 가장 쓸모있는 도구도 우리말과 글이다. 그리고 이것은 재외 동포에게 우리말과 글에 대한 교육을 더 강화할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