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 얻고, 생기 주는 “아!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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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 얻고, 생기 주는 “아! 고향…”
  • 배한봉 시인
  • 승인 2006.11.20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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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남 함안군 화천

▲ 함양의 명산 여항산 인근에는 아라가야의 고분군이 산재해 있다.
고향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맑은 가을하늘을 볼 때, 가을하늘에 고추잠자리 떼가 비행하는 것을 볼 때, 흰 구름 사이로 언듯언듯 낮달 흘러가는 것이 보일 때, 길을 걷다 우수수 쓸리는 낙엽을 만날 때, 정처 모를 쓸쓸함을 실은 한 줄기 바람이 휑한 가슴을 뚫고 지나갈 때 우리는 문득 고향의 오솔길을 떠올리고 향수에 젖는다.

고향…, 하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면, 푸성귀 소쿠리를 들고 가던 늙은 어머니가 마을 어귀를 돌아 달려 나올 것만 같고, 텅 빈 허전한 마을을 우직하게 지키는 늙은 아버지가 황소를 몰고 걸어가다 돌아볼 것만 같다.

햇빛이 들이치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아버지가 걸어온 지난 세월을 듣고 싶고, 마당에 고추를 말리던 어머니의 고운 꽃냄새가 폴폴거리던 처녀시절이며 억세기만 했던 시집살이 이야기를 따라 가만가만 걸어가고 싶은 눈부신 가을. 가만히 눈을 감으면 딱지치기를 하고, 숨바꼭질을 하던 골목길이 사르락 사르락 가슴 속으로 걸어 들어온다.

생각만 해도 고향은 지친 우리 영혼을 따뜻이 어루만져준다. 하여 우리는 고향을 부를 때 그냥 ‘고향’이 아니라 감탄사 하나를 넣어 ‘아! 고향’이라고 부른다. ‘아! 고향’이라고 말할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은 고향에 가 닿는다. 상투적인, 너무나 상투적이어서 오히려 더 아름다운 이 한 마디로 인해 우리의 고독한 영혼은 비로소 평안을 얻고 생기로 차오르게 된다.

내 고향은 경남 함안군의 농촌마을 화천이다. 몇 년 전만 해도 꼬불꼬불 좁은 지방도로를 타고 가야했는데, 지금은 길이 좋아져 마산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면 가 닿는다. 나지막한 경등산 자락에 70~80여 가구가 자리 잡은 마을 앞으로는 들판이 펼쳐져 있고, 들판의 끝자락에는 낙동강 지류인 소량천이 흐르고 있다.

소량천은 우리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강변에 소를 풀어놓고, 한 망태씩 소꼴을 베어놓고부터는 강에 들어가 개헤엄을 치면서 놀았다. 강바닥에서 대칭이 조개를 건져 올리다가 강 건너 마을 아이들과 서로 강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 아닌 싸움을 하곤 했다. 그 싸움이 끝나면 네편 내편 없이 서로 사이좋게 가지고 온 찐 감자나 옥수수를 나눠 먹었다. 어떤 날엔 둑길을 따라 5리쯤 떨어진 낙동강까지 달려가 시퍼런 낙동강 물살을 헤치며 한여름 더위를 식혔다.

소량천과 마을 중간에는 큰벌이 있었다. 그 늪지대에는 사계절 내내 철새들이 와서 살다 떠났다. 가끔씩 포수들이 공기총을 쏘아 새를 잡아갔고, 개구쟁이들은 풀숲을 헤쳐 새알을 주웠다. 소쿠리와 일명 ‘바께스’라 불리는 양동이 하나만 들고 가면 고동과 물고기, 미꾸라지를 가득 잡을 수 있었다. 그 덕에 여름부터 겨울이 오기 전까지 집집마다 붕어찜과 추어탕 끓는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

▲ 함양에서는 6가야국 가운데 맹주국이었던 함양의 옛 역사를 기리는 지역축제 '아라가야제전'이 해마다 성대히 열린다(왼쪽). 함안의 화천농악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소등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우리는, 우리가 붉디붉은 풍경을 향하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가을이었던 것이다. 집집마다 담장 옆에 심어놓은 감나무들이 저녁노을 속에서 환하게 불타오르며 귀가하는 우리를 향해 온몸을 출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둘러보면 사방은 잘 익은 벼들로 인해 온통 황금빛이었다. 그러면 우리의 몸도 황금빛으로 물들어 부쩍 키가 자라고 생각들이 익어갔다.

이러한 때에 맞춰 마을은 한 바탕 큰잔치를 연다. 이름하여 성황대제.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3호인 ‘화천농악’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고향마을은, 마을 앞으로 광려천이 흘렀는데(지금은 칠원 쪽에서 물줄기를 틀어 마을로 흐르지 않는다), 이 냇가에 능수버들이 늘어져 있어 동네이름을 유천(柳川) 또는 유정(柳亭) 이라 부르다 후에 화천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매년 음력 10월 1일과 12월 보름날에 냇가 버드나무 가운데 가장 큰 나무인 성황목(城隍木)에 마을사람 모두 대제(大祭)를 올리고, 농악을 치며 집집마다 돌며 성주풀이를 부르고 지신밟기를 하면서 국태민안(國泰民安)과 풍년을 기원하였다.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 ‘화천농악’이다.

1960년대 초에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 그 뒤 전주대사습놀이 장원 등 전국규모 대회를 휩쓸다시피 했다. 화천농악은 구성지면서도 씩씩한 특징을 갖고 있어 영남 서남지방 농악을 대표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옛 빨래터 자리에 몇 년 전 화천농악전수관이 세워졌다.

어릴 때 우리는 ‘성황대제’ 지내는 날을 일러 ‘동네 할배나무 제사 지내는 날’이라 부르며,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동네 할배나무 제사 지내는 날엔 큰 황소 한 마리를 잡았다. 떡과 고깃국을 맘껏 먹고, 풍물패를 따라 다니는 일은 어린 우리에게도 신명 그 자체였다.

그 흥겨움은 잠 속에서도 이어지곤 했다. 그 꿈같은 날들이 흘러가고, 무장무장 함박눈이 쌓이는 날이었다. 이른 새벽 나는 푸드덕 까치 날아오르는 소리에 잠을 깼던 적이 있다. 마을 청년들이 정월 대보름 달집태우기를 준비하느라 대를 베고 솔가지를 쳐 모으고 있었다.

뒷산에다 만들어 세운 거대한 달집에 소원을 적은 종이를 넣고, 보름달이 뜨면 풍물을 치며 달집을 태우는 일은 ‘성황대제’와는 다른 또 하나의 큰잔치였다. 그때 나는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머니를 따라 오래도록 달님을 향해 손을 모았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 정든 고향을 떠난 것은 집안에 불행이 겹치면서였다. 몇 년간 투병을 하던 작은 형의 죽음과 아버지의 목 척추 골절 인한 오랜 입원 생활로 가세가 기울었고, 젊은 시절 초등교직을 거쳐 경찰직에 잠시 몸담기도 했던 아버지는 농사마저 지을 수 없게 되자 남은 전답을 팔아 마산으로 이사를 했다.

그럼에도 고향은 늘 저절로 눈길이 가 닿는 곳이다.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연(緣)으로 연결돼 있다. 아버지와 나는 고향 선산에 자그마한 과수밭을 일궈 감나무와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과수원에 간다는 핑계로 수시로 고향땅을 밟는다.

과수원에 가면 가장 먼저 내가 태어나 자랐던 옛집을 바라본다. 뒤뜰에는 100년도 더 묵은 감나무가 우람하게 팔을 벌리고 나를 품어준다. 장대로 홍시를 따먹던 그 감나무에는 까치집이 여럿 있었다. 나무를 타고 올라가 얼기설기 나뭇가지와 마른 풀줄기로 엮인 그 까치집에서 막 부화된 까치새끼를 보고는 파리며 벌레를 잡아다 주었던 일도 있다.

한 번은 아버지가 송아지 낳는 것을 내게 보게 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생명이 귀중하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생명 탄생의 신비를 직접 보게 하고 알게 했다. 닭이 품고 있던 알에서 부화되는 병아리를 볼 때처럼 가슴이 뛰는 일이었다. 그런 일들은 내게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게 한 소중한 경험이다.

지금도 고향 마을 동구에는 몇 아름이나 되는 느티나무가 늠름하게 서 있다. 나보다 20~30년쯤 더 나이를 먹은 그 나무는 모험을 좋아하는 소년들이 나무타기를 배우며 놀던 나무이다. 그 나무를 지나 달구지가 지나다니는 코스모스 길을 걸어 초등학교를 다녔다.

마을 입구 길이 2차선으로 넓게 포장되고, 논으로 개간되었던 큰벌에는 몇 개 공장이 들어섰지만, ‘동네 할배나무’는 대를 이어 아직도 건재하게 서 있다. 나는 아무 집이라도 대문을 열고 들어가 물을 먹고, 급하면 화장실을 이용한다. 여느 농촌과 다름없이 젊은이들은 객지로 흘러가고 노인들만 남았지만, 공동체 정신은 변함없고, 온기는 살아있다.

고향 가는 길은 따뜻하고 아름답다. 가까이 있건 멀리 있건 고향은 언제나 우리 마음에서 싱싱하게 살아있다. 가을 맑은 하늘을 두둥실 떠가는 흰 구름을 볼 때, 보름달을 스쳐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볼 때, 붉디붉게 익은 감들처럼 고향은 우리 마음에서 익어 눈부신 풍광을 펼친다. 그 풍광은 또 넉넉하고 아름답고 그리운 ‘아! 고향’으로 가는 길을 열어젖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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