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0주년 특별기획> 북방에 핀 고려인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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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0주년 특별기획> 북방에 핀 고려인의 꽃
  • 연합뉴스
  • 승인 2005.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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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한국현대사를 관통한 불멸의 음악가 정추 박사

   (알마티=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나는 반체제 인사가 아니었다. 내 음악은 항상 한국을 향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1923년 전라남도 광주 출생, 일제탄압과 해방, 월북, 6.25전쟁, 모스크바 유학과 망명, 카자흐스탄 정착. 고려인들로부터 '카자흐스탄의 윤이상'이라 불리는 정추(82) 박사가 걸어온 인생행로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월북 이후 1947년 사망자로 처리됐기 때문이다. 1990년 40여 년만에 모국을 첫 방문한 그는 1994년에 잘못된 사망자 서류를 바로 잡았다.

   "23년을 남한 국민으로 살다가 월북해 13년을 북한 인민으로, 구소련에서 17년을 무국적자로, 다시 16년을 구 소련 공민으로 그리고 현재는 카자흐스탄의 국민으로 살고 있다"
   정 박사의 음악인생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관통하는 험난한 길이었다. 파란만장했던 망명 생활 동안 그는 두 권의 귀중한 자료를 만들었다. 북한에 흩어져 있던 우리 민요를 직접 채록한 것과 1979년 레닌그라드 연극영화음악대에서 박사 논문으로 발표한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민요를 채록 정리한 것이다.

   구 소련의 음악가 사전에 올라 있는 그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 계보에서 4대째에 속하는 작곡가라는 해설이 붙어 있으며 카자흐스탄 음악가 사전에는 민족 음악적 성격이 강한 작곡가로 소개돼 있다.

   그는 음악가로서 명성을 날리며 카자흐스탄 알마티 국립대 한국학과 학과장을 지냈다. 독립 유공자 후손들의 모임도 이끌고 있다.

   정 박사는 "1941년 광주고보(현 광주일고) 재학시 창씨 개명과 조선어 사용문제로 일본인 교관과 충돌한 뒤 퇴학 당했다"며 "집에서 1년 간 지내다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아 서울로 올라와 양정고보에 들어가 수학했다"고 밝혔다.

   그의 큰 형인 고(故) 정준채 영화감독은 1946년 좌.우 합작 영화인 '민족전선' 촬영차 방북했다 북한에 주저앉았다. 그는 '북조선 국립 영화촬영소'를 설립해 1950년 북.소 친선을 그린 영화 '친선의 노래'를 만들어 국제기록영화상을 받았다.

   큰 형은 1956년 최승희의 무용 '사토성의 이야기'를 영화화하려고 모스크바에 갔다 북으로 돌아간 이후 소식이 없다. 정 박사는 "1960년 이후 영화잡지 등에서 형의 이름을 본 적이 없으므로 그 이전에 숙청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박사는 "형이 있었고, 남조선 예술인들을 초청했기에 북으로 갔으며 이승만 정권의 전횡이 꼴 보기 싫어서 탈출구를 찾았을 뿐 월북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다"라며 "형과 함께 일하며 영화음악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평양로어대학(현 외국어대 전신)을 나와 평양음대 교수로 있던 그는 1951년 차이코프스키 음대로 유학을 떠났고, 1958년 8월 알마티로 망명했다. 당시 그는 북한 유학생들과 함께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던 김일성 우상화 작업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한 것이 화근이 돼 귀국 명령을 받았지만 망명을 택했다.

   300여 곡의 음악을 작곡한 정 박사의 곡은 카자흐스탄 음악교과서에 60곡, 피아노 교과서에 20곡이 실려 있다.

   그는 KBS 해외동포상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통일에 기여하겠다"는 말로 3시간의 인터뷰를 마친 그는 "고국의 품에 잠드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ghwang@yna.co.kr
  (끝)

등록일 : 11/2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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