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이 물려준 성씨 100만달러 벌어
상태바
조상이 물려준 성씨 100만달러 벌어
  • 한명희
  • 승인 2005.05.1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배건재회장 성공 스토리

한국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인 1956년, 21살 나이에 홀연히 유학길에 오른 배건재 청년.

경남 하동군 북천면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진주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학업성적이 뛰어나 어렸을 때부터 수재로 통했다. 그가 꿈을 안고 여의도 공항을 떠날 때 지니고 있던 것은 주머니 깊이 감춰둔 20달러와 겨울 옷가지 그리고 가슴에 묻어둔 오기와 집념뿐이었다.

배회장이 겪은 체험담에는 1950년대와 6,70년대 격동기 한국역사의 궤적이 함께 묻어난다. 그시대 사람들이 함께 겪었던 가난은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방학때면 하루 17시간씩 시간당 1달러35센트를 받고 일에 매달렸다. 그리고 어렵사리 3년반만에 밀리킨 대학을 졸업했지만 학비 천달러와 동문회 등록비 150달러를 내지못해 졸업장 조차 건네받지 못했다.

그는 제약회사에서 사회인으로서 첫발을 내딛은 이래 식료품회사 연구원등을 전전한다. 그의 나이 40이 가까워지면서 그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다. 1973년, 직장동료였던 칼슨이라는 친구가 자본을 대고 자신의 성을 영문으로 따서 베이(Bay)제약회사를 설립했다. 그뒤 감기약 베이투신(Baytussin)이 히트를 치면서 승승장구한다.

이때 만난 지금의 아내 옥명화씨는 숙명여대 약대출신으로 배회장에게 큰힘이됐다. 당시 옥명화씨는 자신의 성을 따 여러개의 OK약국 체인을 운영하며 남편의 원군역할을 했다. 이들의 성실성에 하늘도 감복했는지, 행운은 계속됐다. 세계적인 제약업체 독일의 바이엘(Bayer)에 Bay 상표권을 현찰 백만달러를 받고 넘긴다. 배회장은 조상이 물려준 성씨덕에 백만달러를 벌었다며 기쁨이 배로 컸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이후 배회장 부부는 바이엘로부터 받은 백만달러를 전액 재투자해 아내 옥명화씨와 자신의 이니셜을 따 My-K제약회사로 바꾸고 감기약뿐 만 아니라 145종에 이르는 약품을 생산하면서 연간 3백만점을 국방부에 납품하는 등 제2의 도약기를 맞는다. 그뒤 네덜란드의 Akoz사에 이 회사를 거액에 매도한다. 배회장은 당시 양도소득세만도 천5백만달러를 지불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부터 한인사회와 서비스분야 로 진출했다. KM밴처를 설립하고 자본금 3백만달러를 들여 지금의 포스터뱅크를 열며 금융업에 진출했다. 1989년12월 6백만달러를 들여 2만2천평방피트(618평) 규모의 본점을 신축했으며 지금은 아내 옥명화씨가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최근에는 다섯군데에 지점을 둘만큼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그뒤 은행과 마찬가지로 생소한 분야인  방송으로 진출했다. 당시에는 케이블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전국 50개의 TV채널등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방송사의 모기업인 KM커뮤니케이션스도 옥명화씨가 경영하고 있다.

이밖에 90년에는 일본계로부터 맥헨리에 소재한 채플힐 골프장을 인수했다. 일리노이에서 가장 긴 7백야드에 달하는 17번홀을 포함하는 18홀짜리 골프장을 개발했다. 그의 기업가정신은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세계적인 유명 호텔체인인 하얏트 링컨우드(지금의 퍼플호텔)를 그것도 천만달러의 현찰로 매입, 당시 주류사회에서도 큰 화제가 됐었다. 이밖에 금싸라기 땅에 대한 부동산 투자 등등, 그의 일에 대한 의욕은 지칠 줄 모른다.  

시카고=한명희기자 igodboy@yahoo.com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