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 페테르부르크 한인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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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 페테르부르크 한인사회
  • 윤승규 <다바이>편집장
  • 승인 2005.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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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한인 연결고리 미약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는 한인은 대략 800여명이다. 이중 500여명 이상이 유학생이고 나머지는 선교사 가족, 사업가다. 유학생이 많아 유동인구가 많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인들이 ‘러시아의 심장’, ‘예술과 문화의 수도’라 할 만큼 예술 관련 학교, 극장 등이 많고 유학생들도 대부분 음악, 무용, 미술 등 예체능을 수학하고 있다. 이곳은 높은 교육의 질에 비해 교육비가 저렴해서 자녀들의 학업을 위해 들어왔다가 사업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민들은 주로 관광 관련하여 여행업,식당업에 종사한다. 한인회는 아직 없고 다만 고려인협회가 있지만 한인과 교류는 극히 미비하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전경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모스크바에 이어 러시아 제 2의 도시다. 면적은 1,439 제곱킬로미터, 인구는 480만명. 위치는 북위 59도로 핀란드만과 인접해 있어 안개 출몰이 빈번하며, 여름에는 섭씨 35도까지 올라가고 겨울에는 평균 섭씨 영하 7~9도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핀란드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네바(Neva : 핀란드어로 늪)강 델타지역의 총 42개 섬들로 구성되어 있고 580여개의 크고 작은 다리가 있다. (이중 20여개는 거대 선박운항을 위해 교각분리가 가능) 섬들과 다리가 많아서 풍경이 아름답고 ‘물의 도시’, ‘북방의 베니스’라고 불린다. 18세기초 러시아는 네바강과 발트해를 통해 서구와의 직접적 교류를 통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해 나감에 따라,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스웨덴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북방전쟁(1700~1721)이 발발했고, 당시 스웨덴에 대항키 위해 러시아의 황제였던 피터 대제가 네바강 하구에 군사기지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 Peter and Paul Fortress,1703년)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모체를 형성했다. 1712년 피터 대제는 천도를 감행하여 1918년까지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약 200여년간 화려한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다. 1703년 도시 건설 당시 네덜란드식 이름인 ‘성 피쩨르부르그’로 불리다가 1825년 독일식 이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개명, 1914년 1차 세계 대전시 적국이었던 독일식 이름에서 순수 러시아식 이름인 ‘피트로그라드’로 바뀌었다. ▲ 페테르고프 분수궁전
1918년 레닌에게 도시를 헌정한다는 의미에서 레닌그라드로 바뀌었고 1991년에 와서 다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바뀌었다. 이 도시의 명칭에서 역사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국제적인 관광 도시로 무수한 관광 자원을 가지고 있다. 에르미타쥐 국립 박물관 (겨울궁전/250만점 소유/ 세계 3대 박물관), 이삭성당, 페테르고프 (여름궁전/분수궁전), 에카테리나 궁전(호박방), 피의 구원 성당, 카잔 성당,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알렉산드르 수도원, 러시아 미술관, 네프스키 대로, 오로라 전함, 마린스키 극장 등 도시 전체가 ‘하늘 아래 열린 박물관’이라고 불린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제2의 도시이지만 아직 대한민국 영사관이 설치되지 않았다. 대사관이 있는 모스크바와는 직선거리로 약 651km (신의주~부산거리) 떨어져 있어 대사관의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않는다고 봐야겠다. 그래서 많은 대소사건들의 변변한 항변도 못하고 묻혀가고 있다.

거주하는 한인들의 대부분이 유학생이니만큼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스킨헤드(극우민족주의적 폭력단체)이다. 유학생들은 기숙사나 학교 주변, 혹은 외국 학생들이 많은 지역에 몰려 사는데 스킨헤드가 출몰하여 집단 구타를 가하는 일이 빈번하다. 이들은 대낮이건 밤이건, 중심가든 외곽이든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남녀를 불문하여 큰 문제거리가 되고 있다. 학교나 러시아 경찰측에서 보호가 전혀 안되므로 본국 공관에 호소해야 할 길밖에 없으나 그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다다.

최근에는 3명의 유학생이 집앞에서 스킨헤드 10여명에게 집단 구타를 당해 1명이 칼에 10여 군데 찔려 위독한 상황까지 갔었다. 유학생 집은 사도바야라는 지하철역 근처로 시내 중심가였다. 스킨헤드는 금품을 노리는 우발적인 범행과 달리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움직인다.

이들은 평소에 타격할 외국인을 물색하고 일정한 시기에 사건을 터트린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5일후에야 대사관에서 사람이 파견되었고 신변의 위협은 계속되었다. 이외에도 생명에 위협 정도는 아니어도 유학생들에 대한 집단 구타가 빈번히 일어난다. 2004년 러시아에 스킨헤드에 의해 44명이 사망하고 160여명이 중상을 당했다.

보고되지 않은 소소한 사건들까지 합하면 스킨헤드에 의한 사건은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2002년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기숙사에 살던 한국인 여학생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한국인 100여명이 수학하고 있으며 기숙사에는 수많은 외국인이 살고 있다. 기숙사에는 경비가 있었지만 외부인이 들어와 자고 있던 여학생을 살해했던 것이다. 많은 외국 학생들이 각 학교의 기숙사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기숙사는 가장 안전해야 할 장소이지만 이 사건도 흐지부지 종결되었다.

러시아의 전반적인 문제는 치안이다. 더군다나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피터 대제가 도시를 건설할 당시부터 ‘유럽의 창’이라 불리며 적극적으로 외국인을 유치했던 곳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드물게 외국인 구역이 있었고 국교였던 러시아 정교회 외에 가톨릭, 이슬람교, 루터교 심지어는 불교도 허용되었던 곳이다. 전통적으로 외국인 특구의 성격이 강한 페테르부르크에서 치안력이 부재한 것은 러시아에 대한 외국인의 전반적인 이미지 추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이 오히려 외국인을 대상으로 협박, 금품을 갈취하여, 외국인 여행객이나 유학생에게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이곳 상트 페테르부르크에도 스탈린 시절 극동에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 고려인들은 근교까지 포함해서 약 1만여명으로 추산된다. 소연방 해체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독립국가연합에서 도시로 많은 수가 상경했는데, 상트 페테르부르크에도 이곳 출신들이 많다. 고려인들은 식당, 여행사 등에서 종사하거나 한국 비즈니스맨과 사업적 파트너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이주 3세대에 이르러 러시아 사회에 깊게 동화되어 한민족이라는 구속력이 희박한 경우도 많다. 오히려 일부 한국인들은 고려인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거나 그들을 무시하고 있고 고려인들은 한국인들에게 열등의식 내지 상처들을 가지고 있어서 한민족 화합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 20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300주년을 맞아 열린 대한민국 주간 행사중 하나인 장승제 2003년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 300주년이 되는 해였다. 현 러시아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이 50여개국의 정상들을 이곳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초대했었다. 또한 세계 각국의 주간을 정해 나라별로 행사 기간을 가졌다. 대한민국 주간은 2003년 8월 11일부터 17일까지였다. 슬라브학회주관 학술회의, 장승제, 한국 영화제 및 사진전, 과학기술세미나, 무역상담회, 대구시 국악공연 및 패션쇼, 전통연희마당극, 한국현대미술전, 한국관광설명회, 심청 공연(마린스키 극장), 남원국립민속국악원 공연 등 뜻깊은 행사들이 있었고 러시아 현지인들의 호응도 좋았다. 이러한 행사들과 함께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적극적으로 외국과의 교류를 추진하고 있다. 1997년 11월 3일 대한민국 대구광역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데 이어 2005년 2월 16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에는 동서사회연구원이 공식 출범하여 한러 관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2004년 7월 13일에는 대한항공 직항이 취항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한국간 운항을 시작하였다.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당면한 러시아내 사회 문제가 해결되면 훌륭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국제 도시로 발전할 것이다. 지리적, 역사적 환경이 자연스럽게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러시아내 도시이면서도 러시아보다는 유럽적인 국제 도시로서 자리 매김하도록 했다. 한국인이 전 세계 국제 도시에 퍼져있는 것처럼 앞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많은 한국인이 들어올 것으로 예상된다. 높은 교육의 질에 비해 저렴한 교육비, 급등하는 부동산, 해마다 증가하는 한러 무역 교역(32억9천만달러/2002년) 등을 고려할 때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미래에 기대를 걸어도 좋을 것 같다. ▲ 윤승규 <다바이>편집장
윤승규<다바이>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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