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중국동포 수상대표 박봉화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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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중국동포 수상대표 박봉화 회장
  • 안동일 논설위원장
  • 승인 2005.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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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편히 일할 수 있는 날 빨리 왔으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면 몇 권의 장편소설이 나올 것이라고 얘기한다. 이처럼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여기 중국동포회 박봉화회장의 인생역정이야말로 참으로 소설적이다.

그런데도 박회장의 인상에는 그런 그늘이 없다. 박회장을 처음 본 것은 재외동포신문사에서 선정한 ‘올해의 인물’시상식장에서였다. 올해의 수상자인 중국 동포를 대표해서 시상식에 참석했었는데 짧지만 조리있었던 수상 소감이며 동포회 회장이라는 타이틀, 그리고 표정이 밝아보여 인상적이었다. 구로동 외국인 노동자 병원으로 그를 찾았다.

박회장은 현재 노동자 병원 자원 봉사자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곳에 있는 중국동포교회 전도사로 일하고 있다.

▲ 서울 구로동에 있는 중국동포교회와 외국인 노동자병원 건물 먼저 병원 얘기부터 풀어 나갔다. “지난해 7월 개원했으니 벌써 9개월이 된 셈입니다. 그동안 많은 외국인 노동자 형제들이 이곳을 거쳐갔지요. 아직 모자라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쫒겨다녀야 했고 구박받아야 했던 우리들을 안아주고 닦아주는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마음이지요.” 구로동 초입 육교 바로 이래 아담한 5층 건물이 외국인 노동자 병원이다. 5층 전체를 다 쓰고 있는데 언급한 대로 병원 건립의 산파인 김해성 목사의 중국동포교회와 함께 쓰고 있었다. 1층은 사무실, 2층은 병원 진료실, 3층은 입원실 4층은 강의실과 쉼터, 5층이 예배실. 내과 전문의 이완주박사가 원장을 맡고 있는데 3명의 의사 4, 5명의 간호사들이 자원봉사하고 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은 접수에서부터 한족 형제들의 통역, 입원 환자들을 돌보는 간병일까지 뭐 정해진 게 없습니다. 바쁠 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여러 사람 상대하다 보면 이런 저런 일이 많지만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국내 유일의 외국인 노동자 병원, 냉대와 차별에 서러웠던, 몸이 아파도 병원조차 제대로 찾을 수 없었던 그들에게 이 공간은 천군만마로 다가섰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줄잡아 2천명이 진료를 받았습니다. 중국동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남아 서남아 중동 출신 형제들도 자주 찾습니다. 그 중에는 이곳 의료진의 정성어린 치료로 완쾌해서 나간 분들도 많지만 큰 병원으로 옮겨간 환자들도 있고 개중에는 안됐지만 여기서 세상을 떠난 환자들도 있습니다.” 이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은 대개 폐와 간이 나빴던 사람들이란다. 대부분 중국 동포였단다. 어려운 환경에 자신들의 몸을 돌볼 새가 없었기 때문이라면서 남의 일이 아닌 듯 안타까워 했다. “여기서 세상을 떠나게 되면 우리 목사님이 가장 애를 쓰시죠. 목사님이 병원 차량 운전기사 역할도 하고 계시다는 것 잘 아시죠? 그 차에 시신을 태운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시체가 실려 있으면 영구차, 시체 내리면 목사님 자가용 아닙니까?”병원 건립과 운영이 보통의 일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김목사의 노고는 역시 알아줘야 할 일이다. 영안실이 따로 없기에 1층 화장실에서 시체를 닦고 부검까지도 한단다. 그래서 그런지 1층 화장실에서 나는 묘한 냄새가 새삼 야릇한 기분으로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이곳에는 1백여 명의 동포들이 기숙하고 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자신들의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동포들의 쉼터로도 활용되고 있는 것. 요즘 병원은 염가의 진료비를 받고 있지만 쉼터는 숙식 모두 무료다. 경기도 나쁘고 단속도 심해 일자리를 얻지 못한 동포들이 몰려들기에 잠자리며 먹는 사정이 썩 좋은 편은 아니란다.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오갈 데 없는 우리 같은 사람 먹여주고 재워주고 또 아프면 치료해 주고 죽으면 장례까지 치러주는 그런 곳이 있다는 것에 정말 감사해야죠. 사실 중국 조선족 동포들이 이곳에서 워낙 괄시와 천대를 받았기에 흔히 말하는 반한 감정이 적지 않은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김목사님 같은 활동가들이 있어 이런 시설이라도 마련했기에 그런 나쁜 감정이 상쇄될 수 있지요. 앞으로 이런 시설, 기관이 많이 생겨났으면 하는 우리들의 큰 희망입니다.” ▲ 안동일 논설위원장(오른쪽)이 중국동포의 집 4층에서 박봉화 중국동포회 회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진정으로 감사해 하고 보람을 느끼는 박회장을 보면서 오히려 더 좋은 환경과 시설을 만들어 내지 못한 것에 대해, 또 조선족 동포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생각하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어야 했다.

박봉화회장 그의 역정은 바로 조선족 동포들의 역정이기도 하며 처한 상황의 전형이다. 연변 자치주 출신인 박회장은 지난 99년 어렵사리 서울에 왔다. 6년째 접어드는데 식당 허드렛일에서부터 파출부 그리고 병원 간병인 안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했다. 지난해 일괄 구제조치 때 어렵사리 불법체류 신분은 면했지만 오는 5월말까지 자진 출국을 해야 한다. 그래서 걱정이 많다. 

박회장은 65년생이다. 연길에서 백두산 가는 길에 있는 장백이란 마을서 태어났다.
“부모님 모두 중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끝까지 조선적(북한적)으로 사셨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외할아버지는 독립군들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게 압록강변에서 맞아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저 같은 사람이야말로 동포로 인정받아야 하는데 실제에 있어서는 부모님이 북한적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고생 보따리를 풀어내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아버지가  11살 때 돌아가셨고 게다가 엄마가 편찮으셨기에 여동생까지 세 식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여자 혼자 어린 딸 둘을 데리고 산촌에서 살기란 불가능했기에 어머니는 그 아픈 몸으로도 인근 사평이라는 촌락으로 개가를 했었지요. 계부와 또 그쪽의 자식들과 겪은 갈등도 적지 않았습니다. 다 가난했기 때문이지요.”
사평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가정형편 때문에 진학은 엄두도 못내고 재봉틀 기술을 가르쳐 주는 직업학교에 들어갔다. 그때는 인민학교 5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2년 과정이었기에 갓 18살이었단다.

그런데 거기서 병을 얻었다. 그 무렵 중국 산촌 마을의 직업학교의 시설이란 게 뻔한 노릇일터. 찬 바닥 습기 찬 곳에서 며칠 지내다 보니 온몸의 피부에 진물이 나고 썩어 들어가는 몹쓸 피부병을 얻었던 것이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리가 퉁퉁 부어 고름이 잡히는 통에 걸을 수도 없었지요. 병원에서도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다고 고개를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이 엎다시피 해서 집에 데려다 주었지요.”

그때 도와준 친구들이 조선족 친구들이 아닌 한족이었던 게 기억에 새롭단다. 집이라고 해봐야 워낙 어려운 집안 사정에 또 계부의 눈치가 보이자 얼마 후에 어머니와 아예 보따리를 싸서 시집간 언니가 살고 있는 휘남으로 옮겨 정양을 했다.

신앙의 힘으로 지긋지긋한 병이 떨어지자 그녀는 열심히 일했고 교회 일에도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무렵 중국 당국은 전교의 자유는 허락하지 않았지만 신앙생활 자체는 막지 않았단다.

“병든 며느리 봤다고 싫은 내색 한 번 안하신 시부모님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했습니다. 제 병치레 하느라 진 빚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찾은 길이 서울행이었습니다.”
여권 수속이며 비자 발급에 드는 비용 등이 문제였지만 교회의 교우들이 나서 해결해 주었고 남들은 몇 년 까지 걸린다는 수속을 27일 만에 마치고 서울행 여객선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이런 그녀에게 가장 큰 시련은 법무부의 단속이었다.
“잘 다니던 식당에서 단속이 심하니 며칠간이라도 쉬어 달라고 완곡한 해고 통지를 할 때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있는 돈 다 털어 중국에 보낸 날이었기 때문이지요.”
다행히 병원 간병인 일은 단속이 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간병하는 환자를 자신의 친 동기처럼 여기고 정성을 다했다. 자신도 경험한 아픈 사람의 심정, 동병상련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3년전 그녀는 아예 남편도 서울로 불러들였다. 두 사람이 힘을 합해 조금만 고삐를 당기면 빚도 청산하고 시부모와 자식들을 위해 제법 탄탄한 삶의 기반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남편도 새시 만드는 공장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좋았습니다. 저녁이면 둘이 얼마나 신혼처럼 즐겁게 지냈는데요.”

   
▲ 박봉화 중국 동포회장
하지만 자유왕래 할 수 없는 비자 문제는 그녀에게 큰 그늘을 던졌다.
2003년 가을, 그 자상했던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재 입국이 불투명했기에 그녀는 고향에 가지 못했다. 다행히 남편은 합법 체류였기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남편이 문제다. 아직 서울에 있는데 고용허가제에 묶여 벌써 몇 달째 일을 못 찾고 집안에만 있다는 것이다. 

남편은 일단 이달말 출국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는데 이들 부부는 모든 것을 동포법 개정에 걸고 있단다.  “제발 자유왕래하고 마음대로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날이 올까요?”  독일이나 이스라엘의 경우를 보면 당연한 얘기 아닌가 싶은데도 이 말을 하는 박봉화회장의 표정이 어딘가 계면쩍어 보인다고 느꼈던 것은 기자의 지레짐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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