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시카고 한인 이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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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시카고 한인 이민사
  • 박신규기자
  • 승인 2005.0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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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농장이민자 . 유학생 30여명 정착

미주한인 이민사 100년을 맞아 191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초창기 시카고 한인 이민사의 뿌리를 찾아내는 일은 의미있는 작업이다.

수십년전의 장고한 이민 역사를 면밀히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지만 문헌상의 기록과 생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취재의 틀을 잡았다. 특히 시카고 최초의 한인교회가 발간한 <칠십년사>에 기록된 초창기 한인사회 태동모습과 주요 인물들을 바탕으로 주요 이민사의 흐름을 시대별로 정리했다. <편집자>




◇시카고 초기 한인 거주실태=시카고에 최초로 발을 디딘 한국인은 유학생 서재필로 알려져 있다. 유길준에 이어 개화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기도 한 서재필은 ‘갑신정변’ 다음해인 1885년 조지 워싱턴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의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 대령의 딸과 결혼하여 시카고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에 이어서 윤치호가 1893년 8월에 시카고에서 개최되었던 감리교회 총회에 참석차 왔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같은해인 1893년 봄부터 약 반년동안 시카고에서 세계 무역박람회(World Fair)가 열렸는데 그때에도 한국인 방문자들이 왔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들에 대한 기록은 불분명하다.


연방 인구 조사 보고서에는 1910년까지 시카고지역에 한인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로부터 10년후인 1920년 인구조사에는 약 30명의 한인이 시카고에 거주한 것으로 집계돼 있다. 1930년에도 일리노이의 총 한인인구가 100명이 못되었던 것으로 인구 조사국은 기록하고 있다. 물론 연방 인구조사에 응하기에 떳떳한 법적 신분을 갖지 못해서 통계에 누락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이 지역 한인 실세가 상당히 약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0~1920년 시카고에 거류했던 한인들의 거주형태를 보면 하와이 농장 이민을 거쳤거나 유학생으로 온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들 가운데 시카고에서 가장 오래된 인물들로 사업가 강영소 형제들과 식당업으로 돈을 모은 김경이 꼽혔고 박필, 정태은, 오한수, 김홍기, 조종진, 황휘등이 있었다. 유학생으로는 염광섭, 황창하, 현정염, 김여택등 10여명이 있었다.


이들 중에서도 김경은 1912년경 시카고에 왔을 것으로 추정하여 시카고 정착한인 제1번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민병용저 <미주이민 1백년>에 나온 방사겸옹의 회고를 추적하면 방사겸이 1907년 이전에 시카고에서 1년간 쿡으로 일하다가 위튼대학에서 공부했다는 것을 알수 있어 방사겸이 시카고 첫 번째의 거류한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방사겸은 독립운동 기금을 마련한다고 인삼장사를 하면서 떠돌았기 때문에 시카고 지역 한인사회에 기여한 인물로 기억되지 않고 있다.


시카고에서 한인들의 모임이 어떤 형태로든지 태동될 수 있었던 가장 이른시기인 1917년의 시카고시 전화번호부(Chicago City Directory)에는 ‘코리안’으로 된 단체 이름은 전혀 없으며 개인이름으로는 김씨성이 3명이 나타난다. 그 중에 하나가 다운타운에서 김경이 운영하던 식당으로 추정되는 이름으로서 전화부에 ‘Kim, King:B. Manager’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것은 1917년에 김경이 식당을 소유하지는 못하고 비즈니스 매니저로 일했던 것으로 추정케 한다. 그외에는 조셉김과 페리 김이라는 공사계약업자(Contractor)의 자택번호가 1917년에 등재됐다.


1923년 시카고 전화부에 김씨는 5인이 등재됐는데 김경은 1917년 매니저로 있던 ‘버나드 레스토랑’의 주인으로 됐고 남쪽에 식당을 가진 또 다른 김씨(Kim Sung W.)가 있었다.  그 외에 요리사로 일하던 2인의 김씨(Kim D.O., Kim K.C.)와 한 여성(Kim Naomi)이 있었는데 ‘김씨 표본이론’을 적용하면 1923년에 시카고에서 전화번호를 가질정도로 정착된 한인은 25인 정도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1920년대 유학생 활동=중서부 한인유학생회로는 네브래스카주 헤스팅스에서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군사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이 1913년 6월 4일 조직한 유학생회가 최초의 미국내 한인학생회였다. 학생들간의 연락과 친목 및 학술지식 교환을 목적으로 조직된 네브래스카의 첫 한인 학생회에 이어 곳곳에서 학생회가 조직되었는데 시카고에서 최초의 한인학생회는 1918년 10월 8일 조직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에 앞서 1913년 12월에 시카고에도 흥사단 지부가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흥사단 시카고지부가 시카고 최초의 한인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919년 9월2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여러지역 학생대표들이 모여 전 미국 한인학생회 연합조직 결성에 합의했으며 시카고에서는 강영승, 양면진, 현승염, 현정염등 4인이 지역대표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북미유학생 총회의 정식 결성대회는 1921년 4월30일 뉴욕에서 열렸으며 회장에 리용직, 부회장에 조병옥이 선임됐다. 1923년 학생회 총회 본부를 교통의 중간지점인 시카고로 이전했고 이때 회장은 시카고 출신의 염광섭, 부회장은 황창하가 맡았다. 그로부터 1년후 시카고대학에서 전 북미 한인학생 연합회 연차 총회가 열렸으며 이때 조국의 3.1운동 이후의 독립운동에 관한 토론, 그해 5월 연방 입법화된 동양인 이민 금지법에 대한 비판, 그리고 서부지역 광산참사에 희생된 동포 노동자의 문제등을 토론했다.


1927년 ‘북미 대한인 유학생회’로 변경한 이 조직은 회원 255명을 두었으며 1945년 조국의 광복시까지 24년간 존속하다가 인계가가 없이 해체되었다. 한편 1926년 시카고 랜드 맥 넬리 지도회사에 근무하던 청년 송기주가 한글타자기를 발명해 당시 큰 뉴스거리가 됐다.


◇한인교회와 30년대 한인사회=시카고 최초의 한인교회는 설립과정과 시기에 대해 다소 상이한 고증들이 있지만 1923년 9월 창립된 감리교회가 최초의 한인교회로 공식화 돼 있다. 시카고에서 유학생과 거류민들을 포함하는 첫 공식모임의 시작인 감리교회의 태동은 1919년 조국의 3·1 운동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원용 저 <미주한인 50년사>에 따르면 1924년 강영소와 김경, 박장순, 차의석, 김원용, 조희렴, 염광섭등의 발기로 시카고에 한인 감리교회를 설립하고 ‘링컨’ 애비뉴에 있는 미국인 교회 지하실을 예배당으로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27년 이 교회는 ‘레익팍’ 애비뉴로 정식 예배장소를 옮겼으며 이것이 최초의 한인사회 봉사센터이자 기도처였다고 전해내려 오고 있다. 이 교회안에 조직된 학생회는 훗날 시카고 한인회의 시초가 된다.


1930년대 시카고 한인사회 거주실태에 대해 한인감리교회 4대 담임목사였던 갈홍기 박사는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이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의 압력에 따라 중단되기까지 약 7천4백명이 도착했는데 그 중에서 1920년대 후기부터 1930년대로 넘어가면서 화와이 이민중 60~70명이 시카고 부근에 옮겨와 당시 그 가족수가 150명에 이르렀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는 또 “1922년 일제조선총독부의 소위 ‘문화정책’ 시행으로 유학이 허락되어 도미해 온 ‘신도 유학생’ 50여명을 합치면 약 2백명의 한인이 시카고와 인근지역에 거류했다고 볼 수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편 1930년 연방 인구보고서에는 일리노이의 한인이 모두 76명으로 기록돼 있고 그중 시카고 시내에 64명이 살았던 것으로 파악돼 있다. 이들은 주로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주된 활동영역을 가졌으며 당시 유학생 대부분은 법적으로 취업이 엄격히 금해져 교포가 경영하는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고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0년대 시카고 한인들의 직업적 특징은 자영사업과 카페테리아, 주방장, 요리사, 호텔 헬퍼 직종에 취업한 한인들이 많았고 흥사단 단원들은 음식점및 식품점을 주로 경영하면서 자급자족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갈홍기 박사는 “당시 교회는 교포의 취직 및 정보교환의 중심이었으며 교회에 별도로 학생관, 교육관등의 독립시설이 없었으나 실제로 교회 전체가 시카고 및 인근에 거주하는 교포들과 학생들의 정신 및 생활의 중심지였다”고 밝혔다.         박신규기자  skpark@koreadail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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