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부대 해병대전우회, 베트남을 다시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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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부대 해병대전우회, 베트남을 다시 찾다
  • 박정연 재외기자
  • 승인 2012.11.13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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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취재]옛 부대 마을 찾아 현지 중학교 장학금 전달식 갖고 아픈 역사 보듬어

해방이후 6·25를 겪었던 우리 현대사와도 너무나도 흡사하게도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벗어나자마자 전쟁을 겪어야 했던 나라. 초강대국 미국에 뼈아픈 패배의 추억을 안긴 나라. 민주주의 수호라는 그럴듯한 미명 아래 미국의 용병이 되어 대한의 젊은이들이 해군수송선을 타고 떠났던 나라. 8년간의 긴 전쟁에 연 인원 30만여명의 한국군이 파병되고, 그 가운데 5,000여명의 피끓는 젊은 한국 군인들이 생명을 잃어야만 했던 아픈 역사의 땅, 베트남은 우리에게 그렇게 기억되고 있다.

책으로 읽는 공식적인 역사는 아직도 베트남 전쟁을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대 세력간 대리전’이란 한줄의 표현으로 ‘단순규정’하고 있지만, 정작 참화를 겪어야 했던 누군가에겐 베트남전은 ‘전쟁’이란 단어 이상의 뭔가 좀 더 복잡한 설명하기 힘든 의미로 기억된다. 영웅담처럼 늘어놓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참전용사들의 얘기 속에도 그들의 시선은 늘 허공을 바라보고, 듣다보면 늘 뭔가 불편하고 허전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그 전쟁의 비극을 온몸으로 체험한 주인공들이 전쟁의 참혹한 기억을 고스란히 가슴에 품은 채 반세기만에 베트남을 다시 찾았다. ‘귀신잡는 해병대’라는 명성을 안겨준 청룡부대 해병대 전우회 회원들이 바로 그들. 화약내 진동하는 M16 총자루와 수류탄, 심지어는 미군으로부터 받은 ‘크레모어’라 불리는 대인용 살상지뢰까지 들고 찾아온 그들이었지만, 지금 그들의 주름진 손에 들린 것은 주민들과 어린아이들에게 나눠줄 옷과 학용품, 그리고 과자상자 꾸러미.

지난 1일 베트남 해병대전우회(회장 김일규. 해병 320기) 소속 회원들의 안내를 받아 함께 전세계 흩어져 살던 옛 해병대 전우들과 함께 찾아 간 지역은 청룡부대 옛 주둔지였던 꽝남성 호이안(會安). 베트남 호치민시에서 약 1,400여 km 떨어진 중부 동쪽바다에 위치한 고대도시로 15~17세기 국제무역항으로 그 명성을 떨쳤고, 지금은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 세계적인 문화휴양관광지로도 유명하지만, 베트남 전 당시만해도 ‘호이안’이란 이름은 우리 국민들에겐 청룡부대 주둔지로서 더 유명했다.

귓가에 하얀 서리가 내린 옛 전우들이 40여년 만에 다시 찾은 옛 부대 자리엔 다행히도 중대본부로 사용하던 건물이 남아 있었지만, 오랜 세월 탓에 부대막사 건물은 농가창고로 바뀐 지 오래고, 위병소가 있던 자리는 반쯤 부서진 앙상한 콘크리트 벽만 남아 있었다. 뙤약볕 아래, 흙먼지 펄펄 날리던 연병장터는 일부 텃밭으로 바뀌었지만, 대부분은 이름모를 잡초들만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반세기 만에 이곳을 찾은 이들 초로의 손님들에게 그 당시의 모습이 파노라마 영상처럼 펼쳐진 듯 다들 감회에 젖은 모습이었다.

50여명의 청룡부대 출신 해병대 전우회 회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 허물어진 진지 위에 홀로 앉아 먼발치 능선 자락을 회한에 가득 찬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며, 깊은 담배 연기를 내뿜는 초로의 노신사가 있었다. 이웃나라인 캄보디아에서 독도홍보관을 운영중인 김 정욱 독도사랑국제연합 총재(해병대 195기)가 그 주인공. 1968년 20대 초반 새파란 나이에 오직 젊은 패기 하나만 갖고 남의 나라 전쟁에 무작정 지원, 가족들의 환호와 군악대의 힘찬 밴드연주에 어깨 들썩이며 더블백 어깨 메고 해군 수송선에 올라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그에 있어서 베트남에 관한 기억은 피아식별이 불가능한 칠흑같은 정글속에서 피가 거꾸로 쏟아오를 듯한 격한 긴장속에 오직 총 한자루에 목숨을 의지하며 보냈던 악몽같은 시간으로 가득 차 있다. 전투 중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옛 전우의 피묻은 웃자락을 부여잡고 울 틈도 없이, 또 다시 날아올지 모르는 포탄공격의 공포에 소스라친 기억도 방금 꿈을 꾼 듯 생생하기만 하다.

국방부에서 발간한 베트남전사 기록에 따르면 청룡부대는 불과 6,000여명의 병력으로 연평균 2만 3,000회, 월평균 1,900회의 전투를 치렀고, 100명중 3.2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다. 청룡부대가 주둔한 지역은 호치민루트를 통해 잠입한 월맹 정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접전지로 월맹군 사상자 수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그 당시 얼마나 치열한 전투를 얼마나 많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느덧 고희를 바라보는 그는 40여년 만에 처음 찾은 부대의 흔적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며 지긋히 눈을 감더니, 다시 담배에 라이터를 댔다.

20여년 전 그가 이웃나라인 캄보디아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것도 베트남에서의 기억이 운명처럼 그의 옷소매를 끌어당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 총재처럼 청룡부대 해병대출신 중인 베트남 참전이 인연이 되어 전쟁이 끝난 후 인도차이나 주변국가에 뿌리를 내린 사람들도 의외로 꽤 많다. 베트남에도 수백여명에 달한다. 지금 그는 캄보디아에 독도홍보관을 건립하고, 남은 여생을 캄보디아 빈민구호와 의료활동을 보내고 있다. 어쩌면 과거 몸소 겪은 전쟁에 대한 회한과 속죄의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날 청룡부대소속 해병대 전우회원들은 호이안 디엔반 현의 Nguyen Vn Tam 중학교에서 수백여명의 학생들과 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학금 전달식을 가졌다. 전우회 회원들이 준비한 의류, 신발, 운동용품도 함께 전달했다. 아이들도 맑은 미소로 대한민국 해병대 전우들을 환영해줬다. 순진하고 해맑은 그들의 웃음 속에선 과거 전쟁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는 듯 보였다. (참고로, 이 마을에서 불과 수 킬로 떨어지지 않은 지역엔 ‘디엔즈엉’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한국부대가 ‘베트콩소탕작전’이란 명분아래 민간인 135명을 학살한 곳으로 국내언론에도 여러차례 보도된 지역이다.) 그저 외국에서 도움을 주기 위해 찾은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해줄 뿐이다. 베트남전을 몸소 겪었을 만한 나이의 마을 노인들도 표정만은 놀랄 만큼 밝았다. 어쩌면 그들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용서하고 잊혀지기를 바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들이 품고 있는 과거사 문제에 관해 베트남인들의 가슴 속에 실재하는 아픈 과거까지 지워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 해병전우회에서는 호이안 베트남재향군인회의 협조 하에 벌써 5년째 장학사업을 해왔다. 처음 장학사업 등 도움을 제안했을 때 한때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던 사이인지라 베트남쪽 입장에선 결정내리기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동안 베트남해병대전우회가 진심어린 마음으로 지속적인 도움을 주었던 덕에 베트남재향군인들도 이제는 마음을 열었다. 벌써 그사이 교육용 PC도 수십여대 기증했다. 금년에는 해병대중앙회의 지원을 받아 보다 풍성한 장학사업이 될 예정이다. 곧 청룡부대 이름을 딴 장학재단을 건립하고, 이를 시작으로 내년부터는 장학사업과 별개로 태풍지역 집지어주기와 재해복구사업 등 다양한 대민지원사업을 전개할 예정이다.

오후에는 김인식 전 해병대 사령관의 주재로 청룡부대전우들을 위한 합동위령제를 올렸다. 추도사를 통해 장학사업의 활성화를 통해 양국 국민간 과거의 아픈 상처가 다소나마 치유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생사고락을 함께 하다 산하한 옛 전우들의 넋을 위로하고, 전쟁의 와중에 억울하게 죽어간 200만 베트남 민간인들의 넋도 함께 기렸다.

"삼천만의 자랑인 대한 해병대 얼룩무늬 번쩍이며 정글을 간다.
월남의 하늘아래 메아리치던 귀신 잡던 그 기백 총칼에 담고
붉은 무리 무찔러 자유 지키려 삼군에 앞장서서 청룡은 간다"

위령식 행사후 다 함께 부른 청룡부대 해병대가의 가사다. 함께 따라 부르는 해병대 전우들의 목소리에서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지만, 노랫가사처럼 해병대의 기백만은 여전한 듯 했다.

잠시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더니 김 총재는 베트남 민간인희생자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의 기억속엔 옛 전우들의 희생도 컷지만, 전쟁중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도 엄청 컸다고 진술한다. 베트콩과 민간인 구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오인사격을 할망정 달아나는 가상의 적을 그냥 놓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적이 어디에 숨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만에 하나 베트콩을 놓칠 경우 다음날 동료부대원 전체가 매복당한 채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극한 상황이 수시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민간인 복장을 한 베트콩을 솎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저지른 광기에 가까운 민간인 학살의 아픈 상흔이 그의 기억의 잔상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 싶었다. 그가 연달아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 총알자국 난 전우의 철모를 바라보는 청룡부대원.

오늘날 베트남인들은 더 이상 적어도 한국인들을 대놓고 증오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해서 완전히 기억에서 없앤 것도 아니다. 한국군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한 마을은 9개의 학살 장소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이 마을 언덕에 있는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萬代)를 기억하리라'는 증오비(憎惡碑)의 문구가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최근 들어 베트남경제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베트남국민들의 의식수준과 역사의식도 높아져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과거 베트남전 망자에 대한 전통적인 의례를 되살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전통 속에서 심지어 적이었던 한국군들의 넋을 추모하는 것은 포함되었다고 한다.

이는 "인간의 모든 죽음은 '좋은 죽음'이든 '나쁜 죽음'이든 '이편'의 죽음이든 '저편'의 죽음이든 애도와 위로를 받을 절대적 권리가 있다"는 것이 베트남인들의 전통적인 관념이기 때문일 것을 추정된다. 결국, 모든 살아남은 자들은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과거의 아픈 기억을 극복하려 애쓰고 있는 셈이다.

변화는 전쟁이 끝나고 한 세대가 흐른 뒤 찾아왔다. 베트남이 본격적으로 경제개발을 시작했고, 한국과의 경제교류도 매우 활성화됐다. 이미 수만명의 베트남인들이 해외산업인력으로 한국에서 일을 하고 있다. 베트남 여성들의 국제결혼도 보편화된 지 오래다.

김 정욱 총재는 마지막 남은 담배가 떨어지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

“학교를 지어주고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 것으로 과거에 진 빚을 전부 갚을 수는 없겠지... 그렇다고, 억지로 환심을 사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이게 하나의 불씨가 되어 이 땅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영령들이 조금이라도 그들의 자손들에게 베푼 작은 은덕에 위로를 삼고, 다시 편히 쉬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야. 그래야 함께 참전했던 죽은 우리 전우들의 넋도 편히 쉴 수 있지 않겠어?”

냉전의 시대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기치를 내건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은 먼 옛날 십자군원정을 뒤따랐던 옛 용병부대들이 처했던 운명처럼, 그렇게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들어 우리 스스로를 역사의 또 다른 가해자로 남게 만들어 버렸다.

뉘엇 뉘엇 지는 해를 등진 그의 얼굴이 실루엣 되어 시야에 들어왔다. 참혹한 역사의 현장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그의 이마에 깊이 팬 주름살은 선명했고, 그 주름은 생사고락을 함께 하던 옛 전우가 죽고, 무고한 베트남 민간인들이 죽던 지난 날의 처절한 기억에 대한 궤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글 : 박정연 / 사진 : 캄보디아 해병대전우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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