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시작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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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시작된 것”
  • 이현아 기자
  • 승인 2011.10.05 15: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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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백악관 내 유일한 한인 정책위원 박동우

장애인기능올림픽 연사로 참가하기 위해 방한


백악관에 입성한 한인으로 국내언론에서도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박동우 장애정책위원이 2011 서울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방한했다.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박 위원을 지난 달 29일 잠실에서 만났다.

“오랫동안 준비된 행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국의 위상이 느껴졌어요. 해외동포들로서는 뿌듯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입국하자마자 국제심포지엄의 연사로 참석한 박 위원은 행사를 접한 소감을 이렇게 설명했다.

“최근 대한민국에서 국제적인 행사를 여럿 개최하고 있지요. 이렇게 완성도 높은 장애인 행사를 유치해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것은 그만큼 경제적인 부흥을 이뤘다는 방증이기도 할 겁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동안 소외돼 있던 계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요.”

박 위원은 차분하게 한국에서 열리게 된 장애인기능올림픽 개최의 의미에 대해 본인이 느끼는 소감을 이어나갔다. 그는 이같은 행사가 개최돼 우리 사회에서 특수장애아동의 교육은 물론 장애인들의 취업 및 알선 등 정책적인 변화들이 꾸준히 이어지기를 기대했다.

“해외에서 좋은 사례들이 많아요. 그런 사례들이 국내에도 도입이 많이 되기를 바랍니다. 장애인의 위상은 그 사회가 얼마나 선진화 돼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알고 보면 노력파”

7세 때 소아마비를 앓은 이후 왼팔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된 박동우 위원. 하지만 만나본 사람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그는 매우 쾌활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가족들의 결정에 따라 18세 때 이민을 하게 됐지만,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데 있어서 그가 느낀 것은 어려움보다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그게 불가능했는데 미국에서는 저같은 사람이 면허를 딸 수가 있더군요. 바로 땄지요. 운전을 엄청나게 하면서 돌아다녔어요.”

아직도 소년처럼 들뜬 목소리로 그는 당시의 기억을 회상했다. 막상 그 시절 박 위원과 그의 가족은 생계를 위해 가족 구성원 모두가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지난한 나날이었다. 아직 학생인 박 위원 역시 틈날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도와야 했다고.

“그때에 이민한 분들은 그런 일이 많았으니까요.”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한다. 1960년대 미국의 이민법이 완화 되면서 특별히 기반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로 이민한 한인 가정 중 상당수가 생활고에 시달렸다. 박 위원의 가족들도 그 같은 생활고 속에서 미국 정착을 시도하던 시절이었다. 막상 당시 그가 가졌던 고민은 오히려 언어문제였다고.

“사람들은 흔히 내가 공부를 잘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내가 머리가 좋지 않았어요. 말이 그렇게 안 늘더라고요. 그래서 늘 책을 끼고 살 수 밖에 없었던 거지요.”

알고 보면 무척 노려파라는 점을 강조하는 박 위원. 학교를 졸업한 후 미처 안정된 직장을 얻기 전에 사회생활의 발을 뗀 곳은 한인을 상대로 하는 건강정신센터였다.

한인을 위한 가능한 생각들

“봉사활동처럼 일하던 곳이었어요. 그때 한인가정들 중에는 가정불화에 시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한국의 문화와 다르다보니 가족 내 남녀 역할갈등이 생기게 마련이었죠. 생계는 어렵고, 부인들은 가부장적인 남편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남편들이 이를 완력으로 다스리려다가 폭력사건으로 불거지는 경우도 흔했고요. 그런 일이 생기면 센터 직원들이 방문해 부인을 대피시켰어요. 저도 그 일을 했죠. 하지만 그렇게 대피시킨 아내분이 다음날이면 또 남편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허탈했던 기억이 나네요.”

비록 5개월이었지만 박 위원은 그때의 기억을 통해 이민한 한인가정들, 그리고 한인들에 대핸 애정을 키웠다고 말한다.

이후 미국 전역에 체인을 갖고 있는 대형 전화회사 AT&T에 취직한 박 위원은 26년 간 근속하며 한인들을 위한 다양한 변화들을 이끌어냈다.

“1978년에 우연히 그 회사에 취직했어요. 다행히 능력을 인정받았고 꽤 오래 근무했지요. 여러 부서를 거쳤는데 그때마다 느낀 것이, 한인들을 위한 많은 가능한 일들이 있다는 것이었어요.”

마케팅 부서에 자리를 잡았을 때 박 위원은 회사에 한인 고객들을 상대할 전문 부서의 신설을 건의했다. 한인 밀집지역인 캘리포니아에서 이는 획기적인 도전이었다. 다행히 그 시도는 회사에도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고.

“여러가지 생각을 했어요. 한인 전담부서가 생기면 서비스를 이용하는 한인들이 편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한인 인력을 채용하게 되는데다가, 이를 한인매체들에 광고하다보니 한인 매체들의 수익까지 창출할 수 있는 거죠. 게다가 그 회사는 제법 큰 기업이라 그 회사를 거쳐간 한인들은 다른 회사에도 채용되기가 한결 수월해진다는 전망이 있었어요.”

한인사회를 생각하는 것은 그에게는 이미 몸에 밴 습관같은 것이었다. 그에게는 끊임없는 아이디어들이 있었다.

“좋은 법안과 정책은 수없이 많아요. 하지만 책임자의 의중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죠.”

박 위원의 그런 태도와 생각들은 18만 주민의 가든그로브 시의원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부추겼다.

“가든그로브는 한인 상인들이 밀집한 지역이예요. 한인들의 이권을 보장해주기 위해서는 한인 시의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시의원에) 도전했어요. 여러 차례 떨어졌지요.(웃음) 나는 실패에 익숙한 사람이예요.”

그는 오히려 실패담을 얘기할 때 더 쾌활하고 대담해 보인다. 가든그로브에서 활동하는 한인 상인은 많았지만, 실제로 가든그로브에 거주하는 한인은 별로 없었다. 교육의 질이 좋은 지역에 밀집해 거주하는 한인사회의 특성상 인근 어바인 등에 거주하는 한인 인구가 더 많았던 것. 결국 표심을 연결하지 못한 박 위원은 수차례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비록 저는 실패했지만 다른 여러 훌륭한 한인정치인들의 등장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시의원에 도전하기까지 그는 가든그로브 시 도시계획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한인 노인들이 타고 다닐 수 있는 차량을 도시정책으로 제공하는가 하면, 한인 상권에 도로 정비를 한인 상인들에게 유리하게 하는 등 유의미한 결정들을 만들어냈다.

한인사회에 기여한 적지 않은 도네이션 모금과 직접적인 후원 역시 그가 직접 나서 이뤄낸 전향적인 변화들이었다.

수도 없이 많은 정책과 예산들 속에서 한인사회에 딱 맞는 것들을 뽑아내 실현하는 것. 그것은 박 위원이 지금까지 보여준 많은 변화들을 가능케 했다.

“한인사회에 내가 하는 일들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무엇을 바라고 그러느냐는 것이죠. 하지만 나는 봉사라고 생각할 뿐이예요. 이런 방법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지요.”

백악관 내 처음으로 장애 특보를 임명하며 장애인 인권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오바마 정부는 이렇듯 정책을 필요한 이들에게 맞춰 제공할 수 있는 박동우 위원을 2009년 12월 장애정책위원에 임명했다.

“어디에 가든 나는 항상 유일한 사람이예요. 일테면 나는 그 자리의 하나뿐인 장애인이고, 하나뿐인 동양인이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장애인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동양인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어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변화는 일어나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는 인터뷰가 마무리에 접어드는 순간까지도 끊임없는 아이디어들을 쏟아냈다. 장애인올림픽 후 가든그로브 시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안양의 장애인 단체를 방문할 계획이라는 그에게서 감동보다 먼저 느껴진 것은 무한한 에너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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