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세계한민족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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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세계한민족포럼
  • 재외동포신문
  • 승인 2009.08.24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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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서울 제 10회 세계한민족포럼’이 지난 17일부터 20일까지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70여명의 남북한 그리고 재외동포에 대한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반도 한민족의 미래 그리고 세계’를 주제로 열렸다. 이번 포럼에서는 브라이언 맥도날드 주한 EU 대사가 발표한 ‘EU와 한국관계의 발전과 미래전망’을 비롯해 다양한 강연이 마련됐다. 특히 재외동포에 대한 연구논문 10여편이 동시에 발표돼 관심을 끌었다. 이밖에도 전남대학교, 공주대 한민족연구소가 주관한 재외동포 학술 세션이 마련됐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라는 주제로 열린 첫 번째 재외동포 세션에서는 양성종 재일문화센터 연구원, 김향해 중국 연변대학교 교수, 김 게르만 카자흐국립종합대학교 교수, 나기태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연구원의 발제가 있었다. 이어 김성곤 의원, 민병갑 뉴욕 퀸즈대학 교수, 이계란 중국 연변대 교수, 찰스 김 전 한미연합회 전국회장 등이 ‘통합과 번영을 위한 민족공동체 형성과제’라는 주제의 세션에서 논문을 발표했으며, 이후 국내외 학자들이 함께 종합토론을 진행했다. <편집자주> 

김향해 중국 연변대학교 교수

“아버지 한 풀기위해 학자가 됐죠”


▲ 김향해
김향해(46) 중국 연변대학교 교수가 학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50세 중반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맺힌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서다.
“안동 유학자였던 아버지는 중국 서당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나마 글이랑 멀리 떨어져 있기 싫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훈장 선생님을 도와 청소도 하고, 애들 공부를 봐주고 그랬지요. 그리고 먹고 살려고 집에서 농사도 짓고 했는데, 이분한테 이런 일들이 무척 자존심이 상했던 거였어요. 가슴에 화가 맺혀 심장병으로 돌아가셨어요”
김 교수의 아버지는 못다 푼 한을 자식들이 풀어주길 바랐다. 그래서 연변 변두리 지방 ‘허동’에서 살고 있었던 가족을 문화대혁명 때 연변으로 이주시키는 모험을 감행한다.
“1966년이었습니다. 중국은 집집마다 똑같이 땅도 주고 소도 줬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소를 팔고 땅도 맡긴 돈으로 연길시로 오려고 했어요. 도시에서 공부시키려고요. 그런데 공산당 당원이 길을 막았지요. 아버지는 낫을 들고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길을 뚫었어요.”
하지만 문화대혁명으로 학제가 변해 형제들은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막내인 김 교수만이 대학입시가 복원된 시절을 만나게 된다. 이후 중국 장춘 동북사범대학을 나온 그는 그 뒤로 일본 동경 중앙대학에서 8년 동안 정치학을 어렵사리 공부했다고 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벌었어요. 중화요리, 청소, 빠찡코 등 안 해 본 일이 없지요. 그러다 보니 공부시간이 길어 졌어요. 사실 공부하기가 정말 싫을 정도였어요. 아이를 키울 걱정도 커졌고요.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가 저를 가르치려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포기할 수가 없었죠”
김 교수는 2003년 연변대 교수로 재직했고, 2005년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에서 강의를 시작한다. 서울에 오면서 그는 안동을 찾았다. 아버지가 말한 안동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는 연변 인구가 줄고 있어 붕괴된다는 말이 엉터리라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공부하러 해외로 나가야 한다고 믿죠. 해외에서의 공부가 밑거름이 되어 다시 연변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죠”
그는 이번 대회에 대해 “해외 학자들이 부족한 것 같다”고 꼬집는다. 국내에서 보는 한국이 아니라 중국, 일본, 미국 등 외국에서 보는 한국학이 강의돼야 한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접근법을 통한 연구들을 통해서만 한국인의 자긍심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석호 기자

민병갑 미국 퀸즈대학 대학원 사회학과 교수

“뉴욕에 동포연구소 만들어요”

▲ 민병갑
“전세계적으로 한국학을 연구하는 기관은 여럿이 있지만 재외동포를 연구하는 기관은 없습니다. 우리 연구소가 해외에서 최초로 문을 여는 재외동포연구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뉴욕에 한국 이민자를 연구하는 재외동포연구소가 만들어진다. 미국 뉴욕시립대학인 퀸즈대학 대학원 사회학과 민병갑 교수가 올 가을학기 개관 예정으로 재외동포연구소(Center for Research on Overseas Koreans)를 준비중인 것.
“한국의 재외동포연구기관과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한국외대의 역사문화연구소와는 20일 MOU를 체결할 예정이고요. 전남대한상연구재단과도 협력체계를 만들려고 합니다.”
민 교수는 앞으로 문을 열 퀸즈대학의 재외동포연구소가 재미동포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연구하고 해결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란 기대에 부풀어 있다.
민 교수가 특히 관심을 가지는 분야는 미국의 소수민족, 그 중에서도 유태인에 대한 연구다.
“유태인들에게서 우리 재외동포들이 배울 점이 무엇인가 생각하기 이전에 유대민족과 우리 민족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유대인 학자와 재외동포 학자들은 두 민족 사이에 교육을 중요시 한다든지 가족유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민 교수는 유사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다고 말한다. 중요한 차이 중 하나는 유태인 커뮤니티에는 유태인 단결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유태인기구 연합체(Jewish Federations)가 있다는 것.
“동포사회에도 한인회가 있어 한인 커뮤니티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커뮤니티 안에 분쟁이 생겼을 경우 이를 해결할 능력은 없습니다.”
전세계 동포사회에는 여러 가지 과제가 있다. 한인회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도 그 중 하나다. 그러나 지금까지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퀸즈대학에 새로이 만들어지는 재외동포연구소의 성과 있는 활동을 기대해 본다.   
     
강성봉 기자

나기태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연구원

“안성기에 반해 한국어 배웠죠”


▲ 나기태
“칠수와 만수, 고래사냥은 정말 대단했어요. 한국문화원에서 한 달에 한두 번 한국영화를 보여줬는데, 빼놓지 않고 보았어요”
나기태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연구원(57)이 한국어를 놓치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안성기 때문이다. 8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한 그에 반해 우리말을 더 알고 싶었다고 한다.
“조선학교를 나왔지만, 친구들은 대부분 우리말을 잊어버렸죠. 다행히 저는 안성기 대사를 뽑아서 달달 외운 덕분으로 남들보다 쉽게 공부하고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죠”
나 연구원은 지금 2005년에 세워진 재일한인역사자료관에서 재일동포들의 자료를 수집하고, 자료관을 운영하고 있다.
“80년대부터 재일동포 1세들이 한명씩 세상을 떠나셨지요. 그러면서 그들의 소중한 역사적 자료들이 함께 사라진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어요. 일본장례는 화장(火葬)문화인데요. 재일동포들도 돌아가시면서 자신의 유품들을 태우거나 쓰레기통에 버렸어요. 이때 그분들의 옛날 사진, 문서들이 많이 없어졌지요”
나기태 연구원은 “90년부터 본격적으로 역사관 설립을 위한 열의가 누구 먼저라 할 것 없이 일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재정적인 부담으로 몇 번의 시도가 실패하고 2005년에서야 뜻을 이루게 됐다고 한다.
“벌써 많은 분들의 자료가 사라진 아쉬움이 있지만, 역사관을 세울 마지막 기회는 놓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2003년부터 집집을 돌며 자료를 수집했고, 민단이 10억원을 지원해서 설립할 수 있게 됐습니다 ”
이렇게 해서 역사관에는 2.8독립선언 열사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 오사카부가 발행한 조선인 등록증, 민족학교에서 사용된 교과서, 창씨개명이 되었던 통신표 등 재일동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500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게 됐다.
“자료들은 옛 역사를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주지요. 우리 동포들이 일본으로부터 어떤 고초를 당해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곳입니다”

이석호 기자

찰스 김 전 한미연합회 전국회장

“재미동포 1세와 2세는 다르다”


▲ 찰스 김
찰스 김 전 한미연합회(Korean American Coalition) 전국회장은 “미 한인사회의 1세와 1.5세 그리고 2세를 모두 함께 네트워크하려면 힘이 든다”며 “차라리 이들을 기차 철로처럼 수평적 동반자 관계로 보고 따로 따로 정책을 수립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지난 17일 주장했다.
김 회장은 정체성확립에 어려움을 겪던 재미동포 1.5~2세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들을 위한 단체인 한미연합회(KAC)를 만들어 1.5~2세 교류 활성화에 노력하고 있다.
그는 “동포 1세의 경우 ‘삶 자체가 생존’인 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말과 행동을 다르게 한 경우가 많았다”며 “이런 자신들의 부모를 보며 성장한 1.5~2세들이 반감을 가져 참여율이 크게 떨어진다”고 말했다.
이같은 그의 주장은 현재 우리나라 재미동포 정책 전반이 1세 위주로 흐르고 있어 1.5~2세들이 소외시 당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재미동포 1세와 1.5~2세는 같은 동포지만 문화와 생각이 상당히 다르다.
그는 2세 네트워킹 작업이 시급한 과제로 생각했다. “우리언론에서는 1.5세 몇 명이 미 주류사회에 진입했다고 나오지만, 단편적인 정보에 불과하며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2세 상당수가 활약하고 있다”며 “우리정부가 지금부터라도 이들과의 인적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는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3만여건의 인적자원을 정리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재외동포 관련 연구를 놓고 “국내 여러 학교들과 학자들이 지역 설정을 반영하기보다는 동포 전체를 놓고 진행하는 경우가 많아 이해의 폭이 좁다”며 “지역별, 세대별 전문성을 갖춘 연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재범 기자

김 게르만 카자흐스탄 국립대학 교수

“고려인은 도움만 받는것을 싫어합니다”

▲ 김게르만
김 게르만 교수는 고려인 3세다. 3세면 거의 한국어로 대화가 안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는 대화가 가능했다. 그가 한국어를 정식으로 배운 것은 20여년 전 5개월 동안 서울대에서 연수받은 것이 전부.
“부모님 두 분은 모두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 2세로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교육열이 높은 고려인이었던 어머니는 제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알마티로 이사해, 시장에서 짐치(김치)를 팔아 자식 뒷바라지 해줬습니다”. 짐치는 김치의 함경북도 사투리다. 그는 러시아어를 비롯해 영어와 독일어, 라틴어까지 5개 국어에 능하다.
최근 알마티에는 한국어 배우기 열풍이 분다. 젊은 고려인과 카자흐인들이 많이 배운다. 한국기업 진출이 많아지면서 우리말이 가능한 인물을 찾는 기업이 많아진 것. 대우도 좋다.
“러시아어가 아닌 이곳 원주민 말은 한국어와 어순이 똑같고 비슷한 발음을 가진 단어도 여럿 있습니다. 러시아 문화와 달리 나이드신 어른을 공경하는 등 전통문화 사상도 한국사상과 비슷하고요”.
그는 현지 사람들이 쉽게 한국어를 배우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정서가 비슷해 한국사람과의 국제결혼도 인기다. 통계에 따르면 카자흐스탄 사람을 외국인 배우자로 맞은 숫자가 전체 5번째라고 한다. 그는 이 현상이 문화의 기원이 같기 때문이라고 본다.
“카자흐스탄은 자원이 많은 국가입니다. 민간교류를 위한 지원이 형식적인 것이 아닌 문화, 교육투자로 보고 진행해야 합니다. 도움을 준다고 하면 고려인들이 싫어합니다”
고려사람 김 게르만 교수의 고언이다.                                   

오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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