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삶, 춤으로 불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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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삶, 춤으로 불러내다
  • 이현아 기자
  • 승인 2008.04.24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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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숙무용단 '유랑' 10년만에 국내 재공연


고려인의 삶을 주목한 작품 ‘유랑流浪’이 ‘까레이스키 중앙아시아정주 70주년’을 기념해 지난 18~19일 동안 다시금 국내 무대에 올랐다.

불이 꺼진 공연장에 한 줄기 플래시 불빛이 객석을 어지럽히면서 막이 오른 무대에는 70년 전 유랑을 떠나기 직전 동포들의 모습이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펼쳐진다.

빠르게 편곡한 유행가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무용수들은 각자의 평범한 일상을 춤으로 연기한다. 다가올 유랑의 시절을 상상조차 못한 채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사람들은 사막으로부터 모래바람이 불어오면서 뿔뿔이 흩어져 정처 없는 유랑의 길에 오른다.

박명숙은 ‘춤’만이 아닌 다양한 요소를 무대 위로 끌어들여 고려인들의 삶을 보다 다채롭게 펼쳐내고 있다. 거친 바람을 뚫고 척박한 고난의 땅에 겨우 살아 도착한 한 무리는 “추워”, “배고파”를 외치며 바람 속 저 편의 희망을 찾으려고 한다.

8장에 걸쳐 펼쳐지는 서사는 떠밀려 낯선 곳에 도착한 이들이 희망을 꿈꾸며 정착하지만 다시금 떠나는 질곡의 역사가 삶의 위대함을 바탕으로 감동적인 순환을 일궈내고 있다. 무용수들은 배우가 보여줄 수 있을 법한 정교한 연기를 간간히 선보이는데, 이들이 보여주는 연기는 현대무용의 한계를 뛰어 넘어 서사극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연기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강렬한 서사가 ‘춤’의 세계를 짓누르지 않다는 점이 이채롭다.

작품 자체가 극적인 요소로 무대를 풍성하게 꾸미고 있다면 얽히고설키며 수레를 타고, 장대를 들고, 혹은 서로를 업고, 매고 무대를 수놓는 무용수들의 섬세한 춤사위는 당시 고려인 사회의 유랑에 대한 공포와 혼란을 슬프도록 아름답게 표현한다.

가냘프게 무너졌다가 다시금 약동하는 인간 군상이 관객들이 잊고 있었던 고려인 동포들의 모습을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나가며 관객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역사의 한 조각을 일깨웠다. 무용수가 하나 둘 쓰러지면서 천천히, 그리고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며 끝을 맺는 대단원의 막이 내리자 관객들은 열화와 같은 박수와 환호로 박명숙무용단의 열정에 답했다.

공연을 관람한 이영랑 양(18)은 “솔직히 고려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면서도 “하지만 직접 만난다면 그 분들을 끌어안아 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감상을 말했다.

박명숙무용단이 2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1999년 고려인 정주 60주년을 기념해 첫선을 보인 바 있는 작품 ‘유랑’은 지난 10년 동안 러시아와 호주를 비롯해 수차례의 해외 재공연을 거치며 “치밀한 안무구성, 분명한 주제의식, 군더더기 없는 서술 등 서사무용극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소들을 두루 갖춘 의미 깊은 작품”이라는 평을 받아왔다.

박명숙은 작품 ‘유랑’에 대해 “잊혀졌던 현대사의 한 조각인 구소 동포들의 60년 현대사를 기본 모티브로 ‘우리에게 땅은 무엇이며, 그 땅을 지키고 가꾸기 위해 우리가 이겨내 온 고난의 역경과 끈질긴 생명력’을 현대무용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고 말했다.

박명숙무용단은 78년 ‘박명숙댄스시어터’라는 이름으로 창단된 이래 450여편의 레퍼토리를 소장한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무용단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최근에는 무용단 이름에서 ‘현대’를 덜어내며 외부와 소통하는 ‘열린 춤’을 지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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