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청량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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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청량리’라고?
  • 서명석
  • 승인 2008.03.0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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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살던 고향은 - 서울 청량리 편

누군가가 내게 고향을 물을 때 단 한번도 ‘청량리’라고 답한 적이 없었다. 고향은 그냥 ‘서울’ 이었다.

적어도 내 연배에 ‘고향’이라고 하면, 토담이 있는 시골집이나 농촌의 들녘이 떠오르며 아련한 향수를 일으키는 그 어떤 정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서울은 고향으로서는 자격미달이다. 회색빛의 우중충함과 좁은 골목길(어릴 때에도 좁게 느껴졌다)만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혹 고향을 이야기할 때, 흥분에 마지 못해 쏟아내는 미사여구들, 그리움에 잠긴 듯한 모습들, 해마다 명절이면 질식케하는 정체에도 불구하고 귀성객들의 ‘그리움 담긴 조바심(?)’에 부러움을 느끼곤 했다.
어려서 미처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그저 산과 들을 휘젓고 다니며 뛰어논 추억이 없어 서울이 고향인 것이 심지어 불행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여튼 ‘서울’은 고향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단지 행정지명일 뿐 오히려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 청량리가 그나마 추억이 있는 고향이 아닌가 한다(당시 청량리는 동대문에서 버스로 30분 이상을 가야 닿는 서울의 변두리였다).

한 세대가 훨씬 지난 지금, 나의 고향인 서울을 그것도 ‘청량리’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니 누구 못지않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이어지지 않는 TV광고들처럼 되살아난다. 갑자기 그리움이 솟아났다.

기억 속 깊이 잠겨 있어 끄집어내 본적이 거의 없었던 청량리를 더듬거려 본다. 내가 살던 고향 ‘청량리’는 흔히 청량리라면 연상되는 홍등가 쪽과는 거리가 멀다. 당시 그런 곳이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고, 지금 기억으로 그곳과는 버스로 서너 정류장쯤의 거리에 있는 홍릉을 주변으로 하는 곳이다.

마치 흑인들의 레게머리처럼 골목골목마다 늘어선 수 십동의 이층집들. 벽돌집이지만 일본식 건물인 이 집들은 대여섯 채가 연결되어 있어 언뜻 보기에는 집집이 구분되지 않았다. 담장은 대부분 판자를 이어 붙였고 나무대문이 가운데 버티고 있어 보기만 해도 삐그덕 거리는 듯 했다. 이층방은 다다미로 되어 있었다. 제법 큰 그 다담이방에서 친구들과 함께 멱살을 잡고 집어던지는 유도놀이를 하곤 했다.

어린 시절 이 골목길을 누비며 전쟁놀이를 자주했는데, 당시 장난감이 제대로 없었다. 판자 사이를 엮는 좁은 나무를 뜯어 제법 그럴듯한 장총이나 손잡이가 있는 긴 칼을 만들어 놀곤 했다. 우리들의 장난감 때문에 대부분의 담장은 곧 넘어질 듯 위태위태했고, 일직선이어야 할 판자담은 간신히 버틸 정도로 휘어져 있었다. 그래도 담장이 넘어진 집은 없었다. 자기 집 담만 피해 뜯어냈지만, 온 동네 집들의 담장이 거의 같은 지경이었다.

골목 중간중간에 벽돌담과 철문으로 된 집들이 삐죽삐죽 난 성긴 이처럼 두드러져 있었다.

심심하던 차에 한 녀석이 철문을 걷어차고 냅다 달음질치면 몇 녀석이 연달아 걷어차며 숨차게 우린 어디론가 내달렸다. 우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모인 곳은 홍릉이었다.

당시 홍릉은 담장도 없이 처마있는 작은 대문 하나가 덩그러이 서있었을 뿐 관리인조차 없어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리고 조그마한 동산과 같은 봉분과 그 주변 잔디, 나무 몇 그루가 전부였다.

홍릉은 어린 우리들에게 문화적 가치가 있는 역사적 공간이 아니라 맘껏 뒹굴고 뛰어 놀 수 있는 놀이터에 불과했다. 사철 내내 우리들의 안식처이자 도피처였고, 골목길에서 어른들의 꾸지람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구일 뿐이었다.

눈이 내리면 눈썰매를 타고, 그러다 추우면 마른 풀에 불을 피워 언 몸을 녹이곤 했다. 한 번은 릉 전체를 불 낸 적도 있었다. 윗옷으로 불을 끄려 애썼지만 감당이 안 돼 도망을 치고, 급기야 소방차까지 동원된 큰 불이었다. 이튿날 홍릉은 금빛에서 검은 빛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홍릉에는 조선시대 말 임금인 고종보다 먼저 훙서하신 명성태황후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뒤늦게 알게 된 일이지만 우리의 놀이터였을 뿐인 홍릉에는 일제시대 민족의 설움이 서려 있었다.

이 홍릉의 조성에는 일제의 의도적인 악의가 숨어있다고 한다.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장례문화에 따르면 통상적으로 소나무를 심는다. 그러나 일제는 황제의 릉은 일반 왕릉과는 달리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야 한다는 명분으로 수입종이나 여러 다른 수목들로 심었다.

이는 땅의 지기를 혼란스럽게 하여 땅의 기운을 뒤헝클어 버리겠다는 음모라는 것이다. 또 무덤가에는 인공적으로 연못을 파지 않는 법인데, 능 아래쪽에 의도적으로 연못을 팠다. 연못을 판다는 것은 역적의 집안을 부서버리고 쏘를 판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었다. 즉,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고 뒤흔들어 버리려는 악의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종묘제례 예신회 청검 이효재 글 참조). 한겨울 홍릉에서의 불장난이 당시로는 대형화재가 된 이후 우리는 홍릉을 멀리 하게 되었다.


이어지는 잔상은 전차다.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지만 그 당시 첨단 교통수단인 전차가 우리들의 또 하나의 놀이공간이었다. 친구 아버님이 전차 기관사셨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님이 일하시는 시간을 확인한 후 친구를 앞세우고 청량리역으로 몰려갔다. 인사를 드리고 청량리역에서 동대문역까지 무임승차.

전차의 앞자리인 기관사 옆에 서서 우리는 길가의 늘어선 온갖 상점들을 구경하기에 바빴다. 늘 똑같은 길이었지만 늘 새로운 것들이 보였다. 우리는 기관사 옆자리에 버티고 서서 완장이라도 찬 듯 머리를 곧추 세우고 승하차하는 승객들을 보곤 했다. 기관사 제복과 모자가 아버님을 왠지 높고 대단하신 분으로, 우리의 든든한 후원자로 여기게 했다.

몇 년 전 교통혼잡이 심한 지역간에 모노레일을 설치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당시의 전차가 떠올랐다. 청량리역에서 동대문까지 큰 길 한가운데를 거침없이 다니던 전차였다. 그 무엇도 전차를 가로막지 못했다.
우리들은 그렇게 커갔다.

초등학교 고학년때는 친구의 용돈벌이가 부러워 생각없이 따라 나서기도 했다. 동네에서 하기는 부끄러워 휘경동에서 ‘신문배달’을 했다. 겨울 새벽 매서운 찬바람 속에 단 하루로 끝난 신문배달이었다. 다음 날 몸살로 못나가 잘린 것이었다. 그리고 한 여름에는 큰 나무통을 어깨에 메고 경동시장에서 ‘아이스께끼 장사’를 했다. ‘아이스께끼’라는 외침이 입에서 나오지 않아 이 또한 며칠간의 추억이 되어버렸다. 물론 용돈벌이는 커녕 부모님께 종일 돌아다닌다는 꾸지람만 들었다.

여름 날의 또 다른 즐거운 놀이는 낚시였다. 구멍이 큰 물병을 물 속에 넣어하는 낚시였다. 물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가 잡혀주는 것이었다. 이 낚시 놀이를 하기위해 멀리는 왕숙천까지 원정가기도 했다.
내가 살던 고향, 청량리 골목골목에 어둠이 깔리고, 밤이 깊어지면 어김없이 들리는 정겨운 소리. 그 긴 겨울밤 허기가 스물거릴 때 창밖의 ‘찹쌀떡’ 또는 ‘메밀묵’ 장사의 구성진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사시사철 이른 아침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단잠을 깨우는 생선장수 아저씨의 외침. ‘고래고기!’.

이런 기억의 단편들 외에 청량리에는 원자력연구소(지금의 홍릉수목원)와 갓 생긴 세종대왕기념관이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가장 큰 자랑인 홍파국민학교. 당시 세계에서 학생수가 가장 많은 종암국민학교를 분교하여 설립된 곳이다. 그래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학교였단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홍릉국민학교가 생기면서 그 규모도 작아졌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울음을 우는 곳·····’,시인 정지용이 쓰고, 가수 이동원이 부른 이 '향수'처럼 나의 고향 청량리가 전원의 향수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하지만 이 글을 쓰는 동안 내내 나는 회색빛 옛청량리 골목골목을 희끗해진 반백의 신사가 되어 헤메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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