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길을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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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길을 지나"
  • 박홍점
  • 승인 2008.03.06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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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살던고향은-전남 보성군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강제 징집을 피해 전남 보성군 복내면 일봉리 산골 마을에에 임시로 거처를 마련했다가 아예 주저앉고 말았는데 어머니는 화가 날 때마다 개도 소도 못 살 곳에 뿌리를 내렸다고 아버지를 탓하셨다.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달려가면 복내면에 도착한다. 거기서 다시 한 시간을 걸어 들어가야만 고향 마을 일봉리에 닿을 수 있었다.

비오는 날이면 먼데서 일정한 톤으로 들려오는 아득한, 가슴 한복판을 뚫고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어른들은 그것이 기적소리라고 큰집 작은 집이 모여 사는 화순 이양에서 광주로 가는 기차소리라고 하셨다. 나는 이상하게 기적소리를 들을 때면 까닭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개도 소도 못 살 곳, 여든이 넘은 어머니에게 누군가 고향이 보성 복내 어디냐고 묻는다. 어머니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봉천리 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봉천리는 외할머니의 친정이 었다. 광주 이씨 집성촌으로 그곳에 중학교가 있고 내 고향 일봉리보다는 훨씬 사람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거짓말이라곤 모르는 시골 양반이 그리 서슴없이 시침을 떼는 모습을 보고 문득 그 개도 소도 못 살 곳이 퍼뜩 떠오른다.

고향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길이다. 그것도 얼굴을 할퀴며 달려들던 허허벌판의 바람이다. 구불구불 한없이 이어지던 바람의 광장, 들판 한가운데로 불어오는 바람은 위풍당당했다.

마을 앞 신작로로 버스가 지나간다. 나는 버스를 타기 위해 책가방을 들고 죽기 살기로 뛴다. 아무리 손짓을 해도 버스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달려가 버린다. 입안에 가득 고이는 흙먼지를 삼키며 숨을 몰아쉴 때쯤이면 다리가 뻐근하다. 그때 어머니가 깨우신다. 어서 일어나 밥 먹고 학교 가란다.

늘 마을 앞으로 버스가 다니는 꿈을 꾸었다. 아무개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일와리재에 터널이 생기고 광주까지 길이 뚫릴 거라는 소문이 심심찮게 돌았지만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길을 떠날 때까지 공약을 약속한 아무개는 국회의원이 되지 못한 듯 했다.

10리를 초등학교, 중학교, 9년 동안을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 찬바람이 볼을 때리던 겨울의 하굣길을, 어쩌다 덩치 큰 어른의 등을 만나는 날은 행운이었다. 동네 어른의 등 뒤에서 한 번 꺾어진 바람을 맞으며 걸을 때는 한결 덜 추웠다.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걷는 하굣길은 등굣길보다 훨씬 추워 뒷걸음으로 걸어보기도 했지만 뒷걸음으로 걸을 때는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게 문제였다.

몸을 둥글고 작게 말수 있다면 어른들의 외투 주머니나 오일장에 다녀오는 장보따리 안에 슬그머니 묻어갈 수도 있을 텐데… 장에 다녀오는 경운기나 이따금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트럭 짐칸을 넘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참으로 긍정적인 일이다. 숨을 참으며 걸어 온 길을 지나와 먼 데서 바라보면 참 아름답고 뿌듯하다. 지금 내 기억 속에 저장되어있는 몇 안 되는 영어단어들이 순전히 그 길 위에서 입력되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얼마 전에는 20년 만에 知人들과 등산을 하는데 주위의 걱정과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내 몸은 놀랍게도 가벼웠다. 운동이라곤 모르고 살았지만 실전에 들어가니 10리를 걸어 다녔던 9년이라는 시간의 내공이 실체를 드러낸 셈이다.

그 길 위에서 초록 카펫 위의 자운영을 만났고 바람 속에서 허밍을 날리던 찔레꽃 향기를 만났고 한없이 부드러운 것들이 소나무 가지를 찢어놓던 겨울 아침과의 조우가 이루어졌다. 새들은 그냥 앉았다 사뿐 날아갈 뿐인데 덩달아 한 뭉텅이 눈이 자리를 옮겨 앉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바람의 길 위에도 봄이 왔다. 내접산(來接山)을 감싸고 흐르던 강의 얼음이 녹고 뽀얀 솜털의 쑥이 돋아났다. 교실의 창문을 열면 강바람이 운동장에 빙 둘러서있는 플라타너스를, 화단의 파초 잎사귀들을 지나와서는 귓볼을 어루만졌다. 저만치에서 한없이 조용히 흐르던 강, 그러나 여름이면 꼭 한 둘씩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누구의 오빠나 동생이 그 강물 속으로 숨어들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토요일이었다. 일찍 학교를 파한 단발머리 소녀들이 강가에서 쑥을 캔다. 어디나 조금은 실거운 아이가 있기 마련이다. 때는 중학교 졸업반이었다. 네 명이 모여 저희끼리 대수롭지 않은 웃음의 씨앗을 톡톡 터트리며 마냥 신이 났다. 바구니에 담기는 쑥보다 퍼지는 웃음소리가 더 풍성하다.

그날 우리는 강가에서 쑥을 넣어서 뽑은 따끈따끈한 절편을 먹으며 봄날 오후, 오래 남을 풍경 한 장을 현상했다. 어떻게 집에서 조금씩 쌀을 가져다 빵도 아니고 엉뚱하게 떡을 해 먹을 생각을 했는지? 장터 빵집에 한 번 가 본 적 없었던 우리는 이따금 그때를 이야기하며 박하향처럼 환해진다.

봄이면 부지런한 동네 여자들이 이른 아침을 먹고 바쁘게 어딘가로 갔다. 저녁 무렵 돌아 온 여자들은 마루에 초록 잎사귀가 가득 든 보자기를 풀어놓았다. 덕석 위에서 초록 잎사귀들이 말라갔다. 나는 그것이 한가하게 담소를 나누며 유유자적 우려 마시는 녹차라는 것을 아주 나중에 알았다. 그리고 그녀들은 가용돈을 벌기 위해 멀리 녹차밭에 다녀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릴 적 나한테는 녹차밭이 있는 보성 읍내조차도 아주 그리운 먼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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