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 서양화 기법이 중국의 북경(北京)을 통하여 알려지고 서울의 일부 화가가 초상화와 동물화에서 그 수법을 원용한 것은 18세기 중반부터였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양화' 항목과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나오는 유화 해설 등은 19세기 전반 이전의 '서양화법' 지식과 더불어 적극적인 관심을 알려 주는 기록들이다.
1880년대에 시작된 구미와의 외교적·문화적 교류는 서양화법의 자연스러운 수용의 배경이 되었다.
1900년을 전후하여 새롭게 정착된 서양식 학교 제도의 교과 과목 중의 '도화(圖怜)'는 바로 서양화법을 따른 것이었다. 1899년 네덜란드계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Hubert Vos)'가 중국을 거쳐 서울에 와서 고종 황제와 황태자(뒤의 순종)의 '전신상(全身像)'을 생동감 넘치는 사실적 묘사의 '유화'로 그린 일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최초의 정상적 서양화법의 접촉이었다. 그러나 한국인 양화가의 탄생은 1910년대에 가서야 보게 된다. 동경의 미술 학교에 유학한 '고희동'과 '김관호(金觀鎬)'· 나혜석(羅蕙錫)' 등이 처음으로 서양
화법을 전공하고 돌아온 것이다.1920년대에는 '이종우(李鍾禹)'·'도상봉(都相鳳)'·'김주경(金周經)', 뒤이어 '오지호(吳之湖)'·'길진섭(吉鎭燮)' 등이 등장하여 한국 양화 개척에 활기를 더해 갔다(편집자 주)
이 두 그림은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Hubert Vos)'가 1898년 그린 그림이다. 보스가 한국을 방문한 기간은 짧았으나 당시의 정세를 잘 통찰하였고, 그림 속 고종 황제의 불행한 일생과 한국의 불운, 일본의 횡포 및 한국인의 우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서전 속에 기록하고 있다. 보스가 그린 자신의 초상을 보고 고종은 사진과 같은 유화의 독특한 느낌을 만족하였다고 전해진다. 일본인들은 한국 미술의 모든 건축과 유적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미술가들을 포로로서 일본에 끌고가 작품을 만들게 하는 한편 일본인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일본 미술은 오늘날까지도 매우 한국적인데...제가 그린 민상호의 초상화를 보신 후 황제는 폐하 및 황태자의 실물 크기 전신 초상화를 그리라는 어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개인이 소지하기 위해 황제의 전신상 하나를 더 그려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저는 황제로부터의 선물, 그리고 황제와 그 백성들의 장래에 대한 슬픈 예감을 안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사진출처- '류태영(농촌청소년미래재단 이사장)의 사랑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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