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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大韓國), 고구려국(高句麗國) 영토(領土) 계승
icon 김민수
icon 2012-10-28 22: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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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大韓國), 고구려국(高句麗國) 영토(領土) 계승





중국(中國)은 만리장성(萬里長城) 남쪽의 중원(中原)을 농경민족 한족(漢族)의 영토로, 만리장성(萬里長城) 북쪽,동쪽은 이민족(異民族) 수렵민족인 북적(北狄),동이(東夷)의 영토로 인식하였다.중국(中國)의 진(秦),한(漢)은 북방 오랑캐 북적(北狄) 흉노(匈奴)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축조하였고 중국(中國)의 당(唐) 태종은 만리장성 북쪽의 이민족(異民族) 국가를 복속하고 세계 제국 건설의 야심을 가져 만리장성 북쪽의 오랑캐 북적(北狄) 돌궐(突厥)을 침략하는 등 위협적이었으므로 만리장성(萬里長城) 동쪽의 수렵민족 동이(東夷)의 고구려국(高句麗國)은 중국(中國)의 당(唐)과 유목민족의 침략에 대비하고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요하(遼河)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조했다.중국(中國)이 동이(東夷)의 고구려국(高句麗國)과 북적(北狄) 흉노(匈奴),돌궐(突厥) 등 북방 이민족(異民族) 국가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은 것처럼 동이(東夷) 고구려국(高句麗國)의 연개소문(淵蓋蘇文) 또한 중국(中國)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인 요하(遼河)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조하였는데 북간도(北間島) 지역인 부여성(扶餘城:농안)에서 시작하여 서간도(西間島) 지역의 발해만(渤海灣)에 있는 비사성(卑沙城:대련)에 이르는 1000리가 되는 장성이다. 발해국(渤海國)은 동명성왕(東明聖王)이 건국한 고구려국(高句麗國) 유민(遺民)들의 주도 아래 고구려국 장군 출신의 대조영(大祚榮)이 건국하여 옛 고구려국 영토를 회복한 나라이며 고구려인들이 권력을 잡고 문화도 고구려국 문화를 계승한 나라이다. 발해인들은 항상 고구려국(高句麗國) 계승자로 자처했으며 이웃 나라들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다. 무왕(武王) 대에 왜국(倭國)에 보낸 국서에 발해국(渤海國)은 고려국(高麗國:고구려국(高句麗國))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한민족(韓民族)의 선조들이 건국한 부여국(扶餘國) 이래의 오랜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라고 썼으며 왜왕(倭王)의 답서에는 귀 국이 고구려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이전 고구려국 때와 같이 우리 왜국(倭國)과 국교를 가지게 된 데 대해 매우 축하하는 바이다라고 하여 서로 발해국(渤海國)이 고구려국(高句麗國)의 계승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발해국(渤海國) 문왕(文王) 대에 왜왕(倭王)에 보내는 국서와 왜왕의 답서에도 발해국 국왕을 고려국(高麗國:고구려국(高句麗國)) 왕으로 표기하였다. 신라국(新羅國) 학자 최치원의 글에도 고구려국이 지금은 발해국(渤海國)이 되었다라는 것이 보여 신라국(新羅國)도 발해국을 고구려국 계승 국가로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역사책 중 발해국 멸망 후 처음으로 발해국 역사를 전반적으로 다룬 구당서(舊唐書) 발해전(渤海傳)에도 발해국(渤海國)을 옛 고구려국(高句麗國) 계승 국가로 기록하고 있다.

일연(一然)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궁예(弓裔)가 건국한 나라를 후고구려국(後高句麗國)이라고 하여 궁예가 고구려국(高句麗國)을 계승하는 국가를 세웠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고려국(高麗國)이 고구려국(高句麗國)의 부흥을 표방한 후고구려국(後高句麗國)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서경(西京)을 중시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고려국 성종 12년 요국(遼國)의 대군이 침입하자 서희(徐熙) 장군은 요국(遼國) 소손녕(蕭孫寧) 장군과 회담을 하면서 "고려국이 고구려국(高句麗國)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때문에 나라 이름도 고려국이라고 하며 평양을 도읍지로 삼았다. 고구려국 땅의 경계로 따진다면 요국(遼國)의 동경도 그 경계 안에 있다"고 반박하여 오히려 흥화(興化, 의주)·용주(龍州, 용천)·통주(通州, 선천)·철주(鐵州, 철산)·구주(龜州, 구성)·곽주(郭州, 곽산)의 강동 6주를 회복하기도 하였다. 고려국이 발해국 유민(遺民)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발해국이 고려국과 마찬가지로 고구려국(高句麗國)을 계승한 국가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중국이 편찬한 송사(宋史)에서도 고려국은 본래 고구려국이라고 인식하여 고려열전(高麗列傳)을 서술하였으며 이는 고려국(高麗國)이 고구려국을 승계한 국가라고 인식한 당시 사람들의 역사인식이었으며 이러한 인식은 이후 명사(明史)에까지도 이어졌다. 고려국이 고구려국을 계승하였다고 하는 인식은 고려국(高麗國)이 동명왕에 대한 제사 봉행에서도 알 수 있는데 서경(西京)에 동명왕(東明王)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개경(開京)의 동신사(東神寺)에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어머니 하백녀(河伯女)를 동신성모(東神聖母) 로로 모셨다. 이는 고구려 국모신(國母神) 신앙과 제의(祭儀)를 고려국(高麗國)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897년 10월 12일 백악(白嶽:북악산)과 목멱(木覓: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 황단(皇壇)에서 천제(天祭)를 봉행하고 초대 황제에 등극하며 천하에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는다고 천명하여 조선시대(1392-1897)에 이어 대한시대(1897- )가 시작됐다. 대한국(大韓國)은 한반도 간도(間島) 제주도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울릉도 독도(Dokdo)를 비롯한 인접 도서,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하며 북으로는 말갈(靺鞨:북간도)의 계(界)를 다하여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 남으로는 탐라(耽羅:제주도)을 거두어 귤과 해산물을 공(貢)받은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제주에서 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 영토를 통치했다.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902년 이범윤(李範允)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로 임명하여 간도(間島)를 직접 관할,통치하였으며 1905년 11월 18일 대한국 조약체결권자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체결 비준하지 않아 불법 무효인 을사늑약 불법 늑결로 대한국(大韓國)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제국주의 통감부는 1909년 9월 4일 불법적으로 청과 간도협약(間島協約)을 맺고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동남쪽 대한국령 간도(間島)의 영유권을 청(淸)에 불법 양도했다.대한국(大韓國)은 1910년 8월 경술늑약(庚戌勒約) 불법 늑결로 일본제국주의에 불법 병탄(倂呑)되었으며 3·1 대한광복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3일 한민족사 최초로 주권재민, 3권 분립을 선언한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해에 수립되어 1945년 8월 15일 대한 광복까지 대한광복운동을 펼쳤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대한국(大韓國)의 주권(主權)과 영토(領土)를 되찾아 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로 불법 병탄(倂呑)당한 대한국(大韓國)의 국권을 회복하는 대한 광복(光復)을 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를 수립하였다. 간도(間島)가 대한제국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영토이므로 대한민국의 대한제국 국호 및 영토 계승 및 청나라와 일본제국주의 통감부 간 불법 늑결한 간도협약의 불법 무효를 천명하고 간도(間島)의 영유권을 주장해야 하며 요하(遼河)의 고구려국(高句麗國) 천리장성(千里長城)과 중국 만리장성의 중간선을 한-중 국경으로 하는 국경조약을 중국 정부와 체결해야 한다.

조선국령 대마도(對馬島)는 1419년(세종 1)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가 6월 19일 거제도 남쪽에 있는 주원방포(周原防浦)에서 출발해서 동래(東萊)의 부산포(富山浦) 앞 대마도로 향하여 정벌(征伐)하였으며 대마도 도주는 신하의 예로서 조선국(朝鮮國:1392-1897) 국왕을 섬길 것을 맹세하고 경상도(慶尙道) 동래부(東萊府)의 일부로 편입(編入)을 청하였고 왜구(倭宼)를 스스로 다스릴 것과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조선국 4대 국왕 세종이 이를 허락하고 이후 웅천(熊川)의 제포(薺浦), 동래(東萊)의 부산포(富山浦), 울산(蔚山)의 염포(鹽浦) 등 삼포(三浦)를 개항할 때에 대마도 도주에게 통상의 권한을 주었다.계해조약(癸亥條約)은 1443년(세종 25) 조정을 대표하여 변효문(卞孝文) 등이 대마도(對馬島)에서 대마도주(對馬島主) 소 사다모리와 세견선(歲遣船) 등에 관하여 맺은 조약이며 계해약조(癸亥約條)라고도 한다. 1419년 조선국 4대 국왕 세종이 대마도(對馬島)를 근거지로 하여 말썽을 부리던 왜구(倭宼)들을 정벌한 후 한동안 조선국(朝鮮國:1392-1897)·왜국(倭國) 사이의 왕래가 중단되었으나 대마도주의 간청으로 다시 삼포(三浦)를 개항하여 무역과 근해에서의 어획을 허락하면서 세견선(歲遣船)은 1년에 50척으로 하며 선원 수는 대선(大船) 40명, 중선(中船) 30명, 소선(小船) 20명으로 정하고 이들에게는 식량을 지급하고 삼포(三浦)에 머무르는 자의 날짜는 20일로 제한하는 구체적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예(李藝)는 1443년(세종25)에는 왜구(倭寇)들이 변방에 도적질하여 사람과 물건을 약탈해 가자 대마도체찰사(對馬島體察使)가 되어 포로 7인과 도적질한 왜구 14인을 잡아 왔다.

녹둔도(鹿屯島)는 함경북도 선봉군(先鋒郡) 조산리(造山里)에서 약 4㎞ 거리에 있는 섬이며 둘레는 약 8㎞이다. 1800년대 이후 두만강(豆滿江) 상류의 모래가 유속(流速)에 밀려 내려와 녹둔도와 그 대안(對岸) 사이에 퇴적하여 육지와 연결되었다. 1990년대에는 100호의 인가가 있어 벼·조·옥수수·보리 등이 재배되었고 주변에서는 연어·붕어·황어·숭어 등이 주로 잡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국(朝鮮國:1392-1897) 세종 대에 6진(鎭)을 개척한 이래 여진족의 약탈을 막기 위하여 녹둔도(鹿屯島) 안에 길이 1,246척의 토성을 쌓고 높이 6척의 목책을 둘러 병사들이 방비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배를 타고 섬을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농민들은 상주가 금지되었고 춘경추수기에 한해서만 출입이 허가되었다. 1587년(선조 20) 여진족의 습격을 받고 큰 피해를 당해 당시 책임자였던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그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다. 녹둔도(鹿屯島)가 1860년(철종 11) 청(淸)나라와 러시아의 베이징조약 체결로 러시아 영토가 되어버린 것을 1889년 알고 청나라에 항의하고 녹둔도(鹿屯島)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는 김광훈(金光薰)과 신선욱(申先郁)이 1885∼1905년경 두만강 어귀와 연해주 일대를 16년간 직접 답사하여 제작한 함경도 및 옛 고구려국(高句麗國),발해국(渤海國)지역 지도이다. 아국여지도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대한제국시대의 전통적인 관방지도(關防地圖)라 할 수 있으며 고급 펄프지에 수묵과 채색으로 그린 회화식 지도로 20면으로 접혀져 있어서 펼치면 세로 길이가 3m나 된다. 맨 앞에 목록이 있고 지도 여백에 지역별 가구 수, 거주 인구 수, 물산, 군사관계, 인근 지역과의 거리 등의 정보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1만여 명의 대한국인들이 살고 있었던 옛 고구려국(高句麗國),발해국(渤海國) 지역의 사정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아국여지도를 보면 두만강(豆滿江) 하류에 있던 러시아의 영토가 되어 있는 녹둔도(鹿屯島)는 당시 대한국인들이 살고 있는 대한국(大韓國)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녹둔도에는 113가구, 822명의 대한국인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모두 대한국(大韓國)의 풍습과 가르침을 높이 숭상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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